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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주요인물 4인

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최제우 사진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 견곡면(見谷面) 가정리(柯亭里)에서 1824년(순조 24) 10월 28일에 출생.

먼 선조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있었고, 7대조인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용맹을 떨쳤던 장군으로서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최진립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870년 때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이름은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이 용산서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최치원 선생은 유언에 "우리 동방 나라에 도기운(道氣運)이 어려있어 나로부터 25세 후에 반드시 세상을 개조(改造)할 큰 성인(聖人)이 나올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수운의 부친은 최옥(崔沃 : 1762~1840)이었으며 호는 근암(近庵)이었다. 근암공은 성리학에 깊은 지식을 지녔으며 인품도 출중하여 경상도 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나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당시의 국내상황은 1841년 겨울에 질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여 숱한 백성들이 목숨을 빼앗겼으며 1846년 9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1851년 7월에도 물난리가 나서 수 개월 동안 그 피해가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서양 열강의 후원을 업은 천주교는 1831년에 한국에 교구를 세운 뒤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래서 1839년에는 전국적으로 9천 명의 신도를 확보하였다. 국외적으로는 1840년에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크게 패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는 등 당시 국제 정세는 큰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1845년 부터는 동해와 서해, 남해에 서양 배들인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정부를 긴장시켜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양세력의 후광을 업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하여, 김대건과 8명의 교도를 처형하였다.최제우는 13세에 울산출신의 박씨라는 규수와 혼인하였다. 혼인한지 4년 후에 근암공이 돌아가신 후 최제우는 인생의 한 획을 긋는 본격적인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수운이 세상을 구제할 뜻을 굳히게 되는 본격적인 계기는 을묘천서 사건이다.

1855년 암자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수운은 밖에 낯선 스님이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운이 스님을 바라보자, 스님은 수운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저는 금강사 유점사에서 온 사람으로, 무슨 일로 하여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고 보니 탑 위에 이상한 책이 놓여 있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범상한 책이 아닌지라 주인을 찾아주기 위하여 각처를 돌아다니다가 오늘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서 실례를 하였습니다. 부디 이 책을 선생님께 전하고자 하니 받아 주십시오. "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을묘천서 사건이다. 이 뒤로 더욱 수도생활에 전심하던 중 1860년 4월 5일 수운이 37세 되던 해 우주의 하느님으로부터 도를 전해받는 '천상문답'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은 조카의 생일이었다. 조카의 집에 다녀온 후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며 상제님의 천명을 전해 받는다.

수운은 상제님과의 감응에서 도를 나타내는 글과 도를 닦는 법을 마련하라는 명을 들었다. 이렇게 생겨난 주문이 시천주이다. 그 후 일년 동안 도를 펼칠 방법을 구상하다가 드디어 1861년부터 포덕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던 때였다. 그러던 차 수운이 자신이 믿는 우주의 하느님을 '천주'라고 하는 데서 수운이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수운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후 1862년 3월부터 다시 포덕을 하기 시작하여 11월에는 각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소마다 접주를 두어 그 관내동덕을 통솔, 교화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1863년 8월 13일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수운이 전한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사상과 개벽사상으로서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결정적인 분수령을 형성하며, 당시의 도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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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최시형 사진

동학의 2대 교주.19세 때 밀양 손씨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馬伏洞)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에 뽑혀 6년 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劍谷)으로 이주하였다.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달에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1861년 11월 최제우가 호남쪽으로 피신한 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몸에 익히기 위하여 보인 정성과 노력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 영혜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해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제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삼례역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 중지를 충청 전라도관찰사에게 청원하였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광화문에서 40여 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2차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여,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들을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파견하고, 탐관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를 이유로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농민혁명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向我設位)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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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1

손병희 사진

천도교의 종지(宗旨). 천도교 제3대 교주.독립운동가이자 33인의 민족대표중의 한 사람. 초명 응구(應九), 자는 소소거사(笑笑居士), 도호(道號)는 의암(義菴). 본관은 밀양. 충청북도 청주 출신으로 1882년 동학에 입도하여 2년 후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동학농민군(東學革命軍)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 장군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지역 석권하고 북상(北上)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썼다. 1904년 진보회 (進步會)를 조직하고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하여 각지에 회원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을사조약(乙巳條約)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귀국,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했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大道主 : 敎主)를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죽었다.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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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菴 박인호(朴寅浩) 1855~1940

박인호 사진

1855(철종 6)~1940. 동학농민혁명 때 호서지방 지도자이며 천도교 제 4대 대도주(大道主).본관은 밀양. 초명은 용호(龍浩), 자는 도일(道一), 도호는 춘암(春菴). 충청남도 덕산 출신.

1883년(고종 20)에 동학에 입도, 이듬해인 1884년에는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공주 가섭사(迦葉寺)에 들어가 동학의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종교적 수행을 지도받고, 그 뒤 예산지방에 포교, 서산지방의 박희인(朴熙寅), 德七)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1892년에는 전라도 삼례 교조신원운동에, 1893년에는 동학교도광화문복합상소 때 활약하였다. 또한, 보은 장내리 민중시위 때에는 많은 교도를 동원, 참가하여 덕의포(德義包)라는 포명(包名)과 대접주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1894년 10월 재기포 때에 호서지방에서 박희인과 더불어 기포 덕산 예산 신리원(新里院), 그리고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근대 무기로 반격하자 패하여 분산, 도피하였다.

1900년에 동학의 경도주(敬道主)가 되어 손병희를 도와 동학재건에 힘썼고, 1904년에는 동학교도들로 조직된 진보회(進步會)를 통하여 갑진개화운동(甲辰開化運動)의 일선에 나섰으며, 1907년에는 천도교 차도주(次道主)가 되었다. 이듬해인 1908년 1월에는 천도교 제4세 대도주가 되고, 그 뒤 천도교 제3세 교조 손병희의 지도 아래 천도교 중흥에 힘써서 교세를 크게 일으켰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고, 다음해 10월에 출옥, 천도교 교부를 지도하다가 일제가 대륙침략을 감행한 이듬해인 1938년에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한 것이 발각되어 많은 교도들이 잡힐 때 병석에서 심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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