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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5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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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5대장군

전봉준(全琫準)

전봉준 사진

자(字) 명숙(明淑)그는 체구가 아주 작아서 녹두(綠豆)란 별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영도한 민족의 선각자요 불요불굴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전봉준은 정월 봉기후 안핵사 이용태가 역졸을 거느리고 내려와 동학농민군을 탄압하였지만 이때 전봉준은 좌절하지 않고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 마침내 삼월봉기로 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 해 6월 21일 (양 7월 23일)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을 연금하는 사태에 이르자 전봉준은 삼례에서 9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월23일 공주에서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여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삼남지방 각지에서 봉기하였으나 전봉준처럼 호남의 5천대군을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전열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인물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인싸움을 최후로 동학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 몇 명과 동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 갔다. 때마침 일본군 三尾(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추격해 온다는 정보가 있어 30일 다시 백양사로 이동했다.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지금의 현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 밀고 했다.1894년 12월 2일(양 12월 28일)이었다.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되었는데 동학군들을 경계하여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9일, 동 11일, 동 19일, 3월 7일, 동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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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孫華仲)

손화중 사진

이름 정식 자 화중 호 초산이니 밀양손씨이다.그의 동학과 인연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비롯한다. 그는 한때 처남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이무렵 영남에서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이 한참 퍼지고 있었는데, 손화중은 후천개벽의 동학 종교론에 공명하여 동학에 입교한 것이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의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명하여 마침내 3월봉기 주역으로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다.전봉준은 공초에서 고부봉기를 누구와 협의했느냐는 물음에 손화중과 상의했다고 하였다. 3월봉기에 손화중포가 무장 구수내에 집결하여 전봉준 영솔 아래 고부로 와서 백산봉기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전주 해산후 무장, 장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11월 전봉준의 공주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태인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1월 27일 광주로 진격했다가 12월 1일(양 12월 27일)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그 후 그는 몸을 피하여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高敞郡富安面鞍峴里) 이모씨(李某氏)의 제실(祭室)에 있다가 12월 11일(양 1월 6일, 1895) 제실직(祭室直)인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잡혀 전주감영(全州監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장한 비화 한 토막이 있다. 죽음을 같이 맹세했던 전봉준, 김개남이 이미 관군에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손화중은 실의한 나머지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상을 받아라. 그동안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봉우는 후상을 받고 증산(甑山 평안남도)군수로 제수 되었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 새벽녘 전봉준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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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金開男)

김개남 사진

이름 영주(永疇) 자 기선(箕先) 기범(箕範) 도강김씨(道康金氏)이니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山外面 東谷里 지금실)에서 김대흠(金大欽)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태인(泰仁)은 이웃 금구의 원평(院坪)과 아울러 호남에서 동학이 가장 세를 떨친 곳이다. 그 가운데 산외면 동곡리는 김개남의 출생지일뿐 아니라 전봉준의 성장지로 동학농민혁명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의 삼걸(三傑)로 일컫는 김개남은 그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강경파였다.

그는 남원을 본거지로 우도(右道)의 금산(錦山), 무주(茂朱), 진안(鎭安), 장수(長水), 용담(龍潭)을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順天)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대접주(大接主) 김인배(金仁培)로 하여금 영남의 서남부지방(하동, 산청, 진주)을 관장케 했다. 이해 7월 대원군(大院君)의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찾아온 정석모(鄭碩謨) 일행을 곤장을 치고 두 달 동안이나 연금했던 것이다.

그는 11월 10일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鎭岑)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장금리(長錦里) 매부인 서영기(徐英基) 집에 잠거해 있다가 임병찬(林炳瓚)의 고발로 12월 1일(양 12월 27일) 강화병방(江華兵房) 황헌주(黃憲周)에 피체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임병찬은 김개남을 종성리로 유인해 놓고 김송현(金松鉉), 임병욱(林炳昱), 송도용(宋道鏞)을 시켜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黃憲周)로 하여금 강화병(江華兵) 80명을 거느리고 종성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다음해(1895) 정월 정부에서는 논공 행상으로 임병찬에 임실군수(任實郡守)를 제수했으나 임병찬은 이를 사양했다. 정부는 임병찬 대신 황헌주(黃憲周)를 임실군수로 제수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양 12월 29일) 신시(申時 하오사시(下午四時)) 서교장(西敎場)에서 임의로 처형하여 최후를 마치니 나이 4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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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金德明)

김덕명 묘비 사진

이름 준상(峻相) 자 덕명(德明) 호 용계(龍溪)언양김씨(彦陽金氏)이니 김제시 금산면 삼봉리(金堤市 金山面 三鳳里)에서 출생했다.전라도 동학농민혁명의 중진 인물로 1892년 11월 1일에 있었던 교조신원(敎祖伸寃) 운동의 삼례대회(參禮大會)에 금구(金溝) 지방의 1만여 명의 교도들을 소집하여 대회를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원평의 동학은 조정에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1893년(고종 31) 3월 20일 전라감사로 제수된 김문현(金文鉉)이 조정에 들어갔을 때 전라도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금구 원평의 동학은 물론 김덕명포(金德明包)의 동학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세력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덕명은 원평에 도소(都所)를 크게 설치해 놓고 공전(公錢 세금) 공곡(公穀 국고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공주(公州)패전 후 전봉준과 원평으로 후퇴하여 재거를 계획했으나 11월 25일 원평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27일 태인(泰仁)싸움을 최후로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金山面長興里安靜寺洞)에서 잠거하고 있다가 1895년 1월 1일 (양 1월 25일) 태인 수성군(泰仁 守城軍)에 잡혔다.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 法務部) 권설재판소(權說裁判所)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사형을 선도받고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치니 나이 5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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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崔景善)

최경선 사진

이름 병석(炳碩), 초명(初名) 만석(萬碩), 자 낙필(洛弼) 경선(景(卿)善) 전주최시(全州崔氏)이니 정읍시 북면 월천동(北面 月川洞)에서 출생하여 주산리(舟山里)로 옮겨 살았다. 그의 판결문은 이름을 영창(永昌)이라 하였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3월봉기를 누구와 모의했느냐는 물음에 손화중과 최경선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판결문에는 최경선을 정봉준의 모주(謀主 제일모사(第一謀士라는 뜻)) 또는 고굉(股肱 팔과 다리)이라 표현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태인 사람으로 1893년 11월 고부군민들의 사발통문(沙鉢通文) 대표로 참여하여 다음해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이끌었다.

3월 백산(白山)봉기에서 영솔장(領率將)으로서 동학농민군을 통솔했으며, 5월 전주해산 후 전라도 각 군 현에는 동학농민군의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는데 남원부(南原府)와 나주목(羅州牧)이 이에 응하지 않아 전주 대도소(大都所)에서는 이를 정벌(征伐)하기 위하여 남원에는 김개남을 나주에는 최경선을 보내기로 했다.최경선은 동학농민군 3천을 거느리고 내려가 7월 5일 나주성(羅州城)을 공격했으나 목사 민종열(牧使 閔種烈)의 완강한 저항으로 나주성 점령에 실패했다.

9월봉기 후 일본군이 나주(羅州 영광(靈光)) 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설(說)이 있어 서울 진격에도 참가하지 않고 손화중과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공주(公州)패전 후 전라도 서남부지방의 동학농민군을 나주로 집결시켜 나주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내려오자 11월 27일 광주(光州)로 입성했으나 사태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2월 1일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최경선은 독자로 동학농민군 잔군을 이끌고 남평(南平)을 거쳐 동복(東福)으로 내려가 12월 1일 벽성리(碧城里 現 화순군 南面)에서 관군에 피체되었다.

최경선은 담양(潭陽)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서울에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1895년 3월 30일 최후를 마치니 나이 3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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