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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사진

전주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전라도의 감영이 있던 곳이며 풍패지향(豊沛之鄕 : 건국자의 고향)으로써,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관하였던 경기전과, 시조 및 시조비의 위패를 봉사한 조경묘가 있는 영지(靈地)이었다. 따라서 전주는 정부와 농민군 모두에게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전주는 사발통문 모의 때부터 농민군의 핵심 공격 대상이었고,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함께 관군의 거점이자 농민군의 1차 점령 목표지이었다. 이것이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무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한 전주는 농민군 최대의 승리인 전주성 점령, 관군과 농민군 사이의 격전인 완산전투, 양자 타협의 산물인 전주화약, 그리고 그 성과라 할 수 있는 농민군 집강소체제의 본부인 전주대도소 설치, 재봉기를 위한 농민군의 집결과 해산 직전의 최종 집결 등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에서 주요사건들이 이곳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전주는 농민혁명을 통해 체제 변혁을 이루려는 동학농민군과 이를 막으려는 정부 모두에게 상징적 장소이었고, 그에 걸맞게 진퇴의 공방이 이루어진 격전의 심장부이었다.현재 전주권에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에 입성하였음을 기념하는 전주입성비, 농민군 전주입성 진격로였던 풍남문과 서문 터, 전주집강소 자리였던 선화당 터,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의 처형지이었던 초록바위, 삼례집회 및 2차 농민군 집결지였던 삼례역참 터, 그리고 농민군 최후 전투지인 대둔산 전투지 등 동학농민혁명관련 유적지가 남아있다.

삼례역 참터(삼례집회)

삼례역참 터 전경 사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1170-13 삼례동부교회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교도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이 일대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들이 조정에서 동학을 금지하는 것을 빙자하여 교도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 동학교도는 이 같은 수탈에 대해 속전(贖錢: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등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동학교도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이른바 교조신원운동이라고 불리는 동학 공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892년 10월 공주에서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은 같은 해 10월 27일 삼례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면서 전라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1월 1일 전라도 각지로부터 모여든 동학교도 1천여명은 삼례역에서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 중지 등을 요구하였다. 동학교도는 전라감사로부터 어떠한 확답도 받지 못한 채, 대신 동학을 금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된 재물수탈 금지의 지시를 각 읍에 내려받는데 성공하였다.삼례에 모였던 동학교도는 이후 11월 말까지 관(官)은 물론이고 교단의 해산 명령도 따르지 않는 가운데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같은 강경한 움직임은 다른 지역의 상황과 차별되는 독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한편, 1894년 9월 2차 농민봉기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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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에 설치되어 있는 그 당시의 대포의 모형

대포 모형 사진

구성19cm포신 225cm사정거리 300~500m형식 이동식제작년도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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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배재

독배재 전경 사진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과 김제시 금산면 원평 사이의 고개 원평에서 모악산 산줄기를 타고 전주시 삼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동학농민군은 텅 빈 전주성을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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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머리고개

용머리고개 전경 사진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동학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에서 이학승이 이끄는 경군(조선의 정규 중앙군대)을 격퇴시키고 군사를 재촉하여 곧바로 갈재를 넘어 정읍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25일 정읍을 완전히 장악한 뒤, 다시 태인, 원평을 지나 전주로 들어가는 지름길인 독배재를 넘었다. 전봉준은 26일 전주의 턱 밑인 삼천(三川)에 이르러 전주성내 내응자에게 연락을 취하는 등 전주성 점령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한 뒤, 농민군을 이곳에 야영시켰다. 다음 날 아침, 용머리고개를 지나 전주성을 향해 진격한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서문과 남문을 통해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동학농민군이 물밀듯이 들어오자 동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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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전투 (완산칠봉)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동학농민군을 뒤따랐던 홍계훈 군대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다음 날 용머리고개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완산, 다가산, 사직단, 유연대 등 주변 산과 골짜기를 연결하여 진을 치고 포열을 정비하는 한편, 완산칠봉 남쪽 구릉에 지휘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동학농민군과 홍계훈의 경군은 전주성을 두고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5월 1일 동학농민군은 남문으로 나아가 군대를 남북 2대로 나누어 완산칠봉의 경군을 목표로 돌진하였다. 남쪽 1대는 남고천을 건너 곤지산 서쪽 벼랑의 골짜기를 공격하였고, 북쪽 1대는 위봉에 올라가 매곡(梅谷)을 사이에 두고 경군과 싸웠다. 5월 2일 경군은 농민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하지는 않았으나, 완산에 설치된 야포와 기관총으로 전주성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였다. 그러나 포탄은 성안에 닿지 않고 서문과 남문 밖의 민가에 쏟아졌다. 5월 3일 전투는 경군과 농민군 쌍방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루었다. 전봉준은 농민군을 직접 이끌고 북문과 서문으로 나섰으며, 이날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앞장 선 소년 장사 이복룡이 전사하였고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으며, 경군 역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처럼 전주성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과 홍계훈의 경군이 치열한 공방전을 주고받을 즈음, 조정에서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였다. 청의 군대가 5월 5일과 7일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5월 5일 대본영을 편성하여 5월 6일 인천항에 선발대를 상륙시켰다.청과 일본군의 조선 상륙 소식은 전주성의 농민군에게도 알려졌다. 전봉준은 조선을 중심으로 한 정국 변화를 타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패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조건이 수용되자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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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문

풍남문 사진

보물 308호 /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풍남문은 현재 전주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이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 입성 당시 풍남문과 서문을 통해 들어왔다.

풍남문 사진풍남문 사진풍남문 사진풍남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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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경기전 전경 사진

사적 339호 /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경역 내에는 태조의 영정(보물 931)을 봉안한 경기전과 그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로 나뉜다. 당초의 전각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한 것이다. 1771년(영조 47)에는 조경묘를 세워 이한 부부의 신위를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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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봉산성

위봉산성 전경 사진

전북기념물 17호 /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1675위봉산성은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과 시조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한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부성(全州府城)이 동학군에 의해 함락되자, 전라감사 김문현, 전주판관 민영승, 영관 임태두 등은 태조의 영정과 조경묘의 위패를 이곳으로 피난시켰다.지금은 성벽 일부와 전주로 통하는 서문만이 남아 있는데, 문 위에 있던 3칸의 문루(門樓)는 붕괴되어 없어지고 높이 3m, 너비 3m의 아치형 석문만 남아 있다. 전주 8경의 하나로 성 안에는 위봉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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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오목대 사진

전주시 완산구 교동 1003오목대는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군사를 이끌고 잠시 쉬어가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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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당

한벽당 전경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15호 /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 7-3한벽당은 1404년(태종 4)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의 문신 최담이 그의 별장으로 지은 곳이다. 이곳 역시 조선왕조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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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사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완산칠봉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는 1991년 8월 전라북도문화재위원회가 관군과 동학군이 치열하게 싸운 완산칠봉에 세운 기념비이다.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이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사진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사진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사진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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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객사

전주객사 전경 사진

보물 583호 /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밝혀진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건물의 현판에 풍패지관(豊沛之鄕 : 왕조 개창자의 고향) 전주를 설명할 때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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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처형지(일명 초록바위)

김개남 처형지 전경 사진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 1-2초록바위는 김개남의 처형지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전주의 죄인들 처형지로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많은 농민군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서서학동 파출소 왼편의 산등성이가 끝나는 곳으로 여러 개의 푸른색을 띈 바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천변도로가 개설되면서 공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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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례봉기 역사광장

삼례봉기 역사광장 전경 사진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삼례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서울로 통하는 역참이 있던 곳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숙박이 쉬웠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집결지로 선택되었다. 역참터에 있던 수십기의 공덕비는 완주군 삼례읍 신금리에 조성된 삼례봉기 역사광장에 옮겨져 있다. 이들 비석 가운데에는 동학농민군을 잔인하게 다룬 전라감사 이도재의 영세불망비도 있다.

삼례봉기 역사광장 사진삼례봉기 역사광장 사진삼례봉기 역사광장 사진삼례봉기 역사광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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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 사진

완주군 삼례읍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는 전주에서 삼례로 향하는 국도에서 삼례로 들어가는 입구 천변에 세워져 있다.

삼례봉기 기념비 사진삼례봉기 기념비 사진삼례봉기 기념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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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암

사자암 전경 사진

익산시 금마면 신룡리 미륵산1880년대 중엽 이후 동학교단은 오랜 동안의 지하포교시대를 마감하고 호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여 조직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최시형은 1884년 6월경에 익산 미륵산에 있는 사자암에서 약 4개월동안 머물며 익산, 전주, 여산, 고산, 삼례 등지의 동학교도에게 포교하였다. 이것은 교조 최제우가 1860년대 초에 남원 교룡산성 내의 은적암에서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은 이래, 줄곧 불교계와 상호교류 속에 교세를 확장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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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산전투

대둔산 전경 사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 15대둔산전투는 현재까지 알려진 농민군 최후의 전투이다. 1895년 2월 17일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였으나, 25명의 동학농민군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이날 이후 전라도 일대의 일본군과 관군은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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