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의 암흑속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다

고창 전경 사진

고창은 전봉준의 생가터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난 곳으로 인근의 무장, 흥덕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내부에서 가장 강력하고 중심적인 활동을 하였던 손화중포의 근거지이었다.손화중은 무장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동학을 포교하였다. 그는 전라도 서남부 지방일대에서 가장 큰 동학교세를 확보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백산에서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되어 황토현전투와 황룡촌전투 승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현재 고창에는 무장기포 당시 농민군이 군사훈련을 하였던 여시뫼봉을 비롯하여, 농민군이 점령하였던 흥덕동헌, 무장동헌, 고창읍성 등 동학농민혁명관련 유적이 다수 남아있다.

전봉준 생가터

전봉준 생가터 전경 사진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전봉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지역이 거론되었으나,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볼 때 고창 죽림리 당촌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전봉준생가 사진전봉준생가 사진전봉준생가 사진전봉준생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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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기포지

무장기포지 전경 사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고부봉기 후, 전봉준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고창 손화중에게 피신하였다. 그는 전라도 일대에서 동학교세가 가장 컸던 손화중을 설득하여 1894년 3월 20일 무장 당산에서 호남창의소라는 이름 아래 창의문을 선포하고 봉기하였다. 4천여명의 농민군은 23일 재차 고부를 점령하고 농민군 대열을 백산으로 이동하였다.농민군이 봉기한 이곳은 현재 구수 혹은 구시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는 마을 위에 아홉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구암저수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무장기포기념탑 사진무장기포기념탑 사진무장기포기념탑 사진무장기포기념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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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뫼봉

여시뫼봉 전경 사진

고창군 무장면 신촌리 왕제산여시뫼봉은 무장에서 세를 규합한 농민군이 군사훈련을 하며 본격적인 봉기를 준비한 곳이다. 무장기포의 현장 구수내마을에서 직선거리로 약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이곳은 표고 152미터에 불과한 야산이다. 사방이 터지고 방어와 공격에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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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동헌

흥덕동헌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77호 /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흥덕에서는 접주 차치구가 활동하였던 곳으로 적극적인 사회개혁이 추진되었다. 차치구는 피노리에서 전봉준이 체포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마석의 뒷산인 국사봉 토굴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나 흥덕 수성군에 의해 체포된 그는 이곳에서 불태워져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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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모양성)

고창읍성 전경 사진

사적 145호 /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정읍,흥덕을 연달아 점령한 농민군은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고창을 점령한 농민군은 고창읍성 내의 옥문(獄門)을 열어 죄수를 풀어주고, 읍성 앞에 살며 부정축재를 일삼았던 은대정의 집을 불태웠다.무장동헌고창읍성 내에는 동헌,객사,내아,옥(獄) 등이 남아있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하면서, 신미양요 직후 전국에 세웠던 척화비가 고창읍성 안쪽 오른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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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동헌

무장동헌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35호 /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무장동헌은 1914년 무장이 고창군에 통합되기 전까지 무장군 동헌(東軒)으로 사용되었다. 한 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면서 담을 헐고 벽을 붙이는 등 원형이 많이 변형되었으나 1982년 보수하여 원형을 회복시켰다. 무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관,민이 함께 농민군에게 협조한 곳이다. 이 때문에 무장읍성을 비롯한 부속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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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객사

무장객사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34호 /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객사는 조선시대 때 지방에 내려온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일반적으로 객사는 주관(主館)과 좌우 익헌(翼軒)으로 구성된다. 주관은 궐패(闕牌)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의 수령과 대소관헌이 모여 대궐을 향하여 배례하던 곳이고,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하여 격식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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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현 생가터

정백현 생가터 전경 사진

고창군 공음면 예전리 상례마을정백현은 농민혁명 봉기 과정에서 격문, 통문, 행동규약, 폐정개혁 등을 작성하여 진중에는 물론 전국에 띄웠다. 전봉준은 간혹 자신이 직접 쓰기도 했지만 대서한 경우도 많았다. 무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이어 백산에 집결할 때 비서로 송희옥, 정백현이 등장하는데, 이 두사람은 전봉준의 직속 심복이었던 셈이다. 정백현은 사발통문과, 무장창의문, 사대명의 등 농민군의 주요 격문을 작성하였다.정백현은 농민봉기 와중에 잡히지 않은 몇 안되는 지도자급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서울로 피신하여 이전에 교류하던 판서 신헌구, 참판 이근용, 이중하 등과 연결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진암견문록(眞菴見聞錄)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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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도소

손화중 도소 전경 사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양실마을정읍에서 태어난 손화중은 처음 부안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정읍을 거쳐 무장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무장에서의 포교활동은 괴치리 양실마을의 큰 부자였던 이 아무개의 집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마당이 넓었다고 한다. 이곳에 도소(포교활동의 근거지)를 둔 손화중 대접주는 무장,정읍,고창,부안은 물론 광주,나주,장성,담양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을 대상으로 포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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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30호 / 고창군 아산면 심인리 500선운사 도솔암 좌측 절벽에 높이 17m에 달하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은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를 형상화하였다는 설이 전해내려 온다. 이 마애불의 명치 부근에는 네모진 흔적이 보이는데 불경과 시주자의 이름 등을 적은 복장유물을 보관한 곳이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무렵 이 복장 감실을 둘러싼 전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곳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어서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1820년 전라감사로 왔던 이서구가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도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이 비결을 당시 고창에서 동학을 포교하던 손화중이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화중의 접에만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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