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의 암흑속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다

남원향교 전경 사진

남원은 최제우가 정부의 탄압을 피해 한동안 은거했던 인연으로 동학이 깊게 뿌리내린 지방이었으며, 1890년대 초에는 대접주 김홍기를 중심으로 상당한 교세를 가진 지방이었다. 남원의 동학교세는 기본적으로 친족집단을 중심으로 리,면단위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원에서는 동학세력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기의 삼례집회, 광화문복합상소, 보은,금구집회 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의 참여형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1차 농민봉기에는 소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김개남이 일단의 세력을 이끌고 남원에 주둔했던 집강소통치기에는 김홍기를 비롯한 수천명의 남원 동학세력이 합세하여 폐정개혁에 적극 참여하였다. 김개남이 떠난 2차 농민봉기 이후에는 박봉양 중심의 운봉 민보군과의 전투에 적극 수행하였다.현재 남원권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의 포교지였던 은적암, 남원집강소이었던 남원관아 터(구 남원군청), 남원성, 농민군의 군사훈련장인 요천, 군수물자 보관소이자 농민군 주둔지인 교룡산성, 농민군이 민보군 박봉양 군대와 접전했던 관음치,방아치,장수의 원촌전투지, 2대 교주 최시형이 2차 농민봉기 와중에 은거하였던 임실의 새목치, 그리고 공주 우금치패전 후 동학교단 측 농민군의 후퇴과정에서 관군과 전투하였던 무주 평지말 전투지 등 동학농민혁명관련 유적지가 남아있다.

동학 초기 포교지 터(서형칠 家)

포교지터 전경 사진

남원시 천거동 77-1 광한루 경내 호석부근동학의 포교를 시작한 수운 최제우는 점차 감시가 심해지자 1861년 겨울 제자인 최중희 한 사람만 대동하고 경주를 떠나 전라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남원에 이른 그는 남문밖 저자거리에 있던 서형칠의 집에 머물며, 공창윤,양형숙,양국삼,이경구,양득삼 등에게 포교하였다. 바로 이들의 안내를 받아 교룡산성에 소재한 선국사의 은적암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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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隱迹庵)

은적암 전경 사진

남원시 산곡동 선국사 뒤편은적암은 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善國寺)에 딸려있던 작은 암자이다. 이 암자의 위치는 선국사 뒤편에 자생하고 있는 대나무 숲을 지나 오른쪽으로 산길을 따라 7부 능선까지 오르면 제법 넓은 개활지가 보이는데, 현재에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최제우는 1861년 11월부터 1862년 3월까지 이곳에 숨어 지내며 동학의 주요 경전 중의 하나인 『논학문』과 가사로 된 『도수사』,『권학가』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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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봉기 집결지

백산봉기 집결지 전경 사진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3월봉기 당시 임실의 대접주는 최봉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로한 탓으로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았고, 그의 아들(승우)과 사위(김홍기)에게 명하여 봉기를 지도하였다. 최승우는 운암면 지천리에서, 김홍기는 둔덕면 둔기리(현 오수면 오수리)에서 각각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후 남원성을 점령하는 등 남원일대의 농민군 활동을 주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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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관아터(남원집강소)

남원관아터 전경 사진

남원시 하정동 구)남원군청자리김개남은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과 함께하다 태인에서 갈라졌다.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곡성을 거쳐 6월 25일 남원에 들어왔다. 남원부사 윤병관이 남원성을 버리고 도망쳤기 때문에, 남원은 동학농민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7월 6일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 아래, 전주에서 회합하였다.김학진은 군현단위의 집강소 활동을 공인하였고,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전봉준에게 내주었다. 그는 전라도 각 고을에 글을 내려 보내 농민군 집강소 활동을 적극 도와주라는 지시도 내렸다. 본격적인 집강소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남원대회는 1894년 7월 15일 거행되었다. 이 대회는 전봉준 세력과 김개남 세력이 힘을 합하여, 대외적으로는 일제의 경복궁침탈, 청일전쟁 발발 등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대내적으로는 폐정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각 지역의 집강소가 지역적,개별적으로 움직임으로 통일성이 부족했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이었다.김개남의 주도 아래 있던 남원집강소는 강경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천민부대를 운영하여 신분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남원의 부호(富豪)를 징치하는 등 사회개혁에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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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농민군 훈련터

남원 농민군 훈련터 전경 사진

남원시 천거동 요천김개남은 남원성 안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농민군은 남문밖 광한루 앞에 넓게 펼쳐진 요천주변에 실질적으로 주둔하며 각종 집회, 행사를 갖는 한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일부 농민군은 교룡산성에 주둔하며, 무기를 비롯한 군수물자를 관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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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아치전투지

방아치전투지 전경 사진

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고남산 방아치남원 동학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는 남원 산동면 부절리에서 운봉면 장교리로 이어지는 고남산의 방아치에서, 1894년 9월 17일 한밤중에 발생하였다. 이 무렵은 김개남이 남원에 재입성한 뒤, 인근에서 각종 군수물자를 징발하는 등 본격적인 2차 농민봉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었으며, 아울러 농민군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시기이었다.박봉양은 동학농민군의 침입소식을 접하고, 운봉의 민보군 100여명, 함양의 지원병과 수성군까지 함께하여 수비에 나섰다. 민보군은 방아치 남쪽 장교산성을 근거지로 삼아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특히 장교산성의 성돌을 운반하여 산 아래로 굴려내려 보내며 동학농민군을 압박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영향권을 운봉 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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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지전투지

관음지전투지 전경 사진

남원시 산동면 부절리 고남산 관음치김개남이 2차 농민봉기 이후 10월 14일 전주를 향해 이동하자, 남원에는 10월 25일 임실,장수,담양 등지의 동학농민군이 남원으로 집결하기 전까지 힘의 공백 상태에 있었다. 남원에 재집결한 동학농민군은 경상도 방면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운봉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장수를 점령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한 뒤, 11월 13일 산동면 부절리로 이동하였다.11월 14일 관음치를 사이에 두고, 남원 동학농민군과 운봉의 민보군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전투는 14일 새벽부터 시작되어 15일 오전까지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2천여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함으로써, 남원에서의 동학농민군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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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전투

원촌 전경사진

임실군 운암면 지천리3월봉기 당시 임실의 대접주는 최봉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로한 탓으로 행동에 직접 나서지 않았고, 그의 아들(승우)과 사위(김홍기)에게 명하여 봉기를 지도하였다. 최승우는 운암면 지천리에서, 김홍기는 둔덕면 둔기리(현 오수면 오수리)에서 각각 봉기하였다. 이들은 이후 남원성을 점령하는 등 남원일대의 농민군 활동을 주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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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전투

남원성 전경 사진

사적 298호 / 남원시 동충동번암의 원촌전투에서 승리한 박봉양의 4천여 민보군은 11월 28일 남원성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은 남원성의 동,서,북문에 병사를 매복시킨 뒤, 남문을 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동학농민군 8백여명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수성(守城)에 실패하고, 북문을 통해 도주하였다. 이처럼 남원 동학농민군 세력은 남원성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사실상 해산되어 각지로 흩어졌다. 이후 농민군은 민보군의 소탕전을 피해 숨어지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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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양 비

박봉양 비 사진

남원시 운봉읍 서천리 선두숲운봉은 지리산과 이어지는 산악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서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영남지방으로 진출하려는 남원 동학농민군은 운봉 장악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 이유는 박봉양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운봉의 대표적인 부자이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경상도의 함양,진주,산청,안의 등지의 호응을 받아, 5천여명에 이르는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박봉양은 운봉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에 민보군을 배치하여 동학농민군의 이동에 대비하였다. 박봉양의 민보군은 방아치,관음치전투,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의 원촌전투, 남원성전투 등에서 동학농민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 결과 동학농민군은 영남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으며, 남원에서의 동학농민군 활동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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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원 생가터

김영원 생가터 전경 사진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마을김영원은 그의 할아버지가 진사과에 합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유학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0대 중반에 칠보의 무성서원 색장과 장의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는 과거에 실패하자 삼요정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박준승,양한묵 등이 있다. 1880년대 후반 동학에 입도한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동학의 접주로 임실의 농민군을 이끌었다. 남원성 패배 후 최승우 등과 함께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였다가 돌아온 그는 임실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동료인 최승우,한영태와 함께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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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은신지

최시형 은신지 전경 사진

임실군 청웅면 조항리 새목치2차 농민봉기 당시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은 1894년 11월 초순 청웅면 조항리의 교인 허선의 집으로 들어가 12월 초순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우금치전투 이후 후퇴하던 손병희와 만나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손병희는 2차 농민봉기 이후 농민군이 격전을 벌이던 시기의 대부분을 이곳에 머물며 상황변화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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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 기념비

갑오동학혁명 기념비 사진

임실군 운암면 쌍암리 상운마을 운암초등학교 앞운암초등학교 앞에는 세 개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갑오동학혁명 기념비, 기미삼일운동 기념비, 무인멸왜운동 기념비가 그것이다. 이 기념비들은 임실지역 주민들이 1983년 함께 세운 것이다. 이처럼 성격이 서로 다른 기념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봉성,최승우,김영원,한영태 등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임실일대에서 봉기하여 남원으로 나아가 줄곧 활동하였다. 그러나 11월말 남원성전투 패전 뒤, 임실로 돌아온 농민군 지도자들은 순창의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6년 뒤 임실로 돌아온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은 동학 재건에 성공하여, 순창,진안 등지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였다.이들과 그의 제자들은 재건한 세력을 기반으로 동학교단(후의 천도교)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김영원의 제자인 박준승은 3.1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는 등 3.1운동과 1928년 멸왜운동을 어느 지역보다 활발히 펼쳤다. 3대 기념비는 이러한 일련의 운동과 그 운동의 지도자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갑오동학혁명 기념비 사진갑오동학혁명 기념비 사진갑오동학혁명 기념비 사진갑오동학혁명 기념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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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말전투

소천리 전경 사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손병희의 동학교단 농민군은 태인 성황산전투 이후 장성 갈재를 넘어 순창,임실,장수,금산 등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12월 5일 무주를 점령하기 위해 설천면 소천리에서 이 지역 민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평지말전투이들 농민군은 다시 북상하여 영동,청산,황간 등을 연이어 함락시켰으나, 관군과 민보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최시형,손병희,손천민,김연국 등 동학교단 지도자는 강원도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은신하며 후일을 기약하였다.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 등 전라도의 핵심 농민군 지도자가 체포,처형당한 반면, 동학교단의 지도자 상당수가 관군과 민보군의 추격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함으로써 동학교단을 재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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