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의 암흑속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다

정읍 전경

원평천, 동진강 연안의 비옥한 농지에 형성된 배들평야와 고부천 주변의 드넓은 농토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방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지가 되었다. 행정구역상 고부에 속했던 이 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의 실패 후, 일제시대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인 고부권역의 일부, 태인, 정읍 등이 정읍으로 통합되었다.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최고지도자인 전봉준,김개남의 주 활동무대였으며, 손화중?최경선 등의 출생지이자 동학의 인맥을 맺어나갔던 곳 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었던 고부봉기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 모의에서 행동강령을 정하고, 다음 해 1월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비롯되었다. 아울러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으로 혁명의 기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정읍권에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의미있는 장소로 인정받는 유적지가 많다. 사발통문 모의지인 고부 죽산마을, 고부관아터, 고부봉기의 농민군 집결장소인 말목장터,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 상징물인 만석보, 전봉준고택, 손화중,김개남,최경선 생가터, 황토현전적지, 1차 농민봉기 당시 농민군 지휘부를 재정비하였던 백산봉기터 등이 그곳이다.

사발통문 작성지

주산마을 전경 사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이두형 家)사발통문 작성지 (정읍 고부 이두형 家)1892년 4월에 고부군수로 부임했던 조병갑은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 20명은 1893년 11월 당시 송두호의 집에 모여,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이 회합에서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죽이며,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며, 군수에게 아부하여 백성에게 탐학한 구슬아치를 징치하며, 전주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 사발통문은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조직적 봉기를 계획하고 행동목표를 밝힌 문서라는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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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모의탑

동학혁명 모의탑 사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마을입구 왼쪽 언덕에 사발통문 거사계획 참여자 후손들이 1969년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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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농민군 위령탑

무명농민군 위령탑 사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대뫼녹두회관 앞무명농민군 위령탑은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1994년 건립하였다.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m크기의 주탑과 이를 둘러싼 1~2m크기의 보조탑 32개가 있다. 보조탑은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무기로 사용되었던 농기구 등을 새겨놓았다.

무명농민군 위령탑 사진무명농민군 위령탑 사진무명농민군 위령탑 사진무명농민군 위령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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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관아터

고부관아터 전경 사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현 고부초등학교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부봉기의 중심지이었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19개 면을 관장하는 군에서 일개 면소재지로 몰락하였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본 고장이면서도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다. 고부관아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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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

군자정 전경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133호 /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65군자정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악명높았던 고부군수 조병갑 등이 고부군민에게 탐학을 일삼는 한편 풍류와 사치를 일삼았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주재소?일본인소학교,활터 등으로 사용되다가, 현재에는 개인소유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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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목장터

말목장터 전경 사진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말목장터는 1894년 1월 10일 전봉준 등이 고부관아로 나아가기 전, 이 일대 농민 1천여명이 집결하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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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유지비

만석보 유지비 사진

지방문화재기념물 33호 / 정읍시 이평면 하승리배들평 농민은 정읍천 아래에 보(예동보)를 막아 물을 댔다.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만석보라 하였다. 그러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롭게 보를 쌓았다. 이 때문에 홍수가 지면 오히려 냇물이 범람하여 상류의 논이 피해를 입었다.예동마을뿐만 아니라 보를 쌓은 첫해에는 수세를 징수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는 두말, 나쁜 논에는 한 말의 수세를 강제로 징수하였다. 이에 농민은 봉기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만석보는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虐政 : 가혹한정치)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석보 유지비 사진만석보 유지비 사진만석보 유지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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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동마을

만석보 혁파비 사진

정읍시 이평면 하승리 예동마을고부의 농민들은 만석보를 허물고 예동마을로 이동하여, 이곳에 보관 중이던 세곡(稅穀 :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을만석보 혁파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마을 입구에는 1898년에 세워진 만석보 혁파비가 있다.

최초봉기상징조형물 사진최초봉기상징조형물 사진최초봉기상징조형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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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봉기

백산 전경 사진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한 뒤, 백산으로 이동하였다. 백산은 해발 47m에 불과하지만, 부안,김제,고부,태인 등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배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김개남,손화중, 영솔장 최경선, 총참모 김덕명,오시영, 비서 송희옥,정백현 등으로 진영을 확대개편하고 연합부대를 구성하는 한편,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을 발표하고 농민들의 봉기와 호응을 촉구하였다.

동학혁명백산창의비 사진동학혁명백산창의비 사진동학혁명백산창의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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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전투

황토현 전경 사진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황토현은 해발 35m의 낮은 구릉으로 계곡을 사이에 두고 두승산과 사시봉이 솟아있다.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백산에서 군대를 확대개편 한 뒤, 전주성을 향하여 태인,금구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전라감영에서는 무남영의 군사와 보부상군을 보냈다. 농민군은 부안,태인 등에서 분산해 무남영군을 유인하였다.전주감영군은 태인,백산을 거쳐 진격해왔다. 농민군과 전주감영군은 4월 6일 밤 황토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전주감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이것은황토현전투 기념탑 농민군이 관군과 접전을 벌여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동학농민군은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 등을 차례로 점령,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였다.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사진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사진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사진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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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장군상

전봉준장군상 사진

전북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전봉준장군상 사진전봉준장군상 사진전봉준장군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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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봉

사시봉 전경 사진

정읍시 덕천면정읍시 덕천면 용정에서 도학초등학교 방향의 샛길을 따라 가면, 길 오른쪽 야산이 있는데, 이 봉우리가 사시봉이다. 이곳은 황토현전투 당시 동학농민군의 진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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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성황산전투

태성리 전경 사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 1성황산전투는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군이 인근의 한가산, 도이산 등에 진을 치고, 1894년 11월 27일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대항하여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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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동헌

태인동헌 전경 사진

전북유형문화재 75호 /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431태인동헌은 동학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이다. 이 건물은 순조 16년(1816) 4월 건축되었다. 일제시대부터 20여년전까지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빈 건물로 보존되고 있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 주력이 태인동헌 뒷산인 성황산전투에서 패하자, 이곳에서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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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단비

전봉준 단비 사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전봉준 고택에서 약 5백미터 떨어진 소나무 숲에 있다.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웠다. 원래는 단비만 있었으나, 1994년부터 천안전씨 문중에서 연차적으로 묘역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전봉준은 고창의 당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소농정도의 생활을 하였으며, 생활근거지를 여러차례 옮겼다. 전봉준은 1890년대 초에 동학에 들어갔다. 그는 사회변혁을 바라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동학의 신비성, 주술성과 함께 조직을 활용, 접목시켰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에서 민족의 동력을 이끌어낸 제1의 공로자였다.공주의 패전에서 전봉준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원평 태인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회문산 아래 순창 피노리로 피했다. 전봉준은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변절로 체포되어,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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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고택

전봉준 고택 전경 사진

사적 293호 /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전봉준이 살았던 곳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한약방과 서당을 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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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체포지

피노리마을 전경 사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리마을전봉준은 태인 성황산전투에서 패한 뒤,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 그는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장성 갈재를 넘어 입암산성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다. 12월 2일 그의 옛 부하였던 김경천이 살고있던 피노리로 숨어들었으나, 김경천의 밀고로 이곳에서 체포되었다. 순창,나주,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5차례의 심문을 받은 후, 손화중,최경선과 함께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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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순 영세불망비

조규순 영세불망비 사진

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101조규순 영세불망비는 호남제일의 정자 피향정 내에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1893년 자신의 아버지인 조규순(태인현감을 역임)의 영세불망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군민으로부터 1천냥을 갈취하였다. 이 비는 조병갑의 악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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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갑오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탑 사진

정읍시 쌍암동 392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시에서 세운 조형물이다. 1894년을 의미하는 18.94m의 주탑과 전봉준,김개남,손화중 3거두를 상징하는 금색 금속띠, 그리고 둥근 보조탑 4개의 조형물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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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묘역

김개남 묘역 사진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김개남은 백산대회에서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군 총관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황토현전투, 황룡촌전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남원에서 금산,무주,진안,용담,장수를김개남 묘역 아우르는 지역을 장악하고 폐정개혁에 나섰다.2차 농민봉기 때에는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 함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11월 10일 청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패배하고 말았다. 김개남은 군대를 해산한 뒤, 매부 서영기가 살고 있던 종성리 너디마을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웃마을에 살고 있던 임병찬이 전라감사 이도재에게 신고하여, 12월 1일 새벽 체포당하고 말았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12월 3일 전주에서 임의로 처형하였는데, 이때 김개남의 나이 42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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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중 묘역

손화중 묘역 사진

정읍시 상평동 음성리 음성마을손화중 묘역1996년 후손에 의해 조성된 묘역에는 둘레석을 두른 봉분, 제단,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묘소 앞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있다.손화중은 무장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동학을 포교하였다. 그는 전라도 서남부 지방일대에서 가장 큰 동학교세를 확보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백산에서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되어 황토현전투와 황룡촌전투 승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2차 농민봉기 때에는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 올 것을 대비하여 나주와 광주지역을 지켰다. 그 뒤 각지의 농민군이 패배하자,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숨어지냈다. 그러나 1894년 12월 11일 체포되어, 전봉준,최경선과 함께 다음 해 3월 30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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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 묘

최경선 묘 사진

정읍시 칠보면 축현리 산 73-4최경선은 김덕명과 더불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태인의 김덕명 포에 속한 태인 주산리 접주로 사발통문 모의와 고부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차 농민봉기에는 영솔장 직책을 맡아 황토현과 황룡강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최경선 묘역집강소 통치기에는 전봉준의 지시에 따라 활동지역이 배분되었다.최경선은 나주, 광주일대에서 후방 업무를 맡아봤다. 그는 집강소 통치기에 나주점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나주성을 지켰던 목사 민종렬과 영장 이원우의 활약에 성공하지 못했다.최경선 생가터최경선은 2차봉기 후 광주에서 군수전, 군수미, 농민군을 모집하여 전봉준에게 보냈다. 아울러 일본군이 남쪽 바다를 통해 전라도 땅으로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손화중과 더불어 후방 방어에 남았다. 그러나 공주전투 후 밀려드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에 나섰지만 실패하였다. 그는 동복 벽성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전봉준 손화중과 더불어 같은 날 처형되었다. 당시에는 교수형에 처해지면 시체를 수습하기 어려웠는데, 다른 농민군지도자와 달리 그의 시신은 다행스럽게 수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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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 생가터

최경선 생가터 전경 사진

정읍시 북면 마정리 월천마을 (이재석 家)최경선의 생가는 정읍에서 칠보 방향으로 가다가 축현리 입구 직전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월천마을에 있다. 현재는 양옥집이 자리잡고 있으나, 과거에는 서당으로 사용되었던 사랑채와 창고 등이 함께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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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서원

무성서원 사진

사적 166호 /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이 서원은 황토현전투 당시 김기술 등 태인 유생들이 조직한 민보군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한말의병의 중요한 족적을 남긴 최익현 의병, 임병찬 의병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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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집강소 도소

부안집강소 도소 전경 사진

부안군 행안면 송정리 송정마을 신씨제각부안의 동학교세는 부안접주 김낙철의 노력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교조신원운동기인 광화문복합상소 때에도 이 지역의 동학교도 수백명이 참가하였다. 1차 농민봉기가 시작되자 부안에서도 1894년 4월 1일 부안 대접주 김낙철의 주도 아래, 송정리에 도소를 차리고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후 부안의 농민군은 부안현감 이철화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이 지역의 치안안정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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