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의 암흑속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다

김제 원평 전경

삼례가 서울에서 전라도,경상도로 나아가는 길목이라면, 김제 원평은 전라도 남부에서 전라감영 전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원평은 일찍부터 각종 생산물의 집산지이자 많은 유동인구가 모여드는 장소이었다. 이곳에는 언양김씨가 세거지를 이루고 있었다. 김덕명은 원평접주로 활동하며 활발히 동학을 포교하고 있었다. 그는 1893년 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집강소 통치시에는 원평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에 나섰다.우금치 전투 패전 후, 전주까지 밀려 내려온 동학농민군은 원평과 태인에서 관군,일본군 연합부대를 맞아 싸울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원평 구미란전투와 태인 성황산전투에서 연이어 패함으로써 농민군은 해산하였다.현재 원평에는 원평집회 장소인 원평읍내, 원평집강소 도소, 김덕명 생가터, 구미란 전투지, 전주입성 직전 농민군 집결장소인 원평 팥정, 농민군 진격로인 독배재 등의 동학농민군 유적지가 남아있다.

구미란전투지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 구미란마을공주전투 패전 후 원평과 태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 지도부는 농민군 5~6백명을 이끌고 원평의 뒷산에 진을 쳤다. 12월 25일 새벽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에 들어왔다. 이때 농민군은 산의 삼면을 지키며 品자형을 이루어 방어하고 있었다.일본군은 산아래 들판에서 산을 향해 포를 쏘아댔다. 이때 전투지역인 시장의 점포와 구미란 마을의 집 40여채가 불탔고 농민군의 곡식 2백여섬과 민가의 물건도 깡그리 불탔다.

구미란전투지 사진구미란전투지 사진구미란전투지 사진구미란전투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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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입성 직전 선전관 처형지

원평장터 전경 사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원평장터장성에서 경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농민군은 전주입성을 위해 잠시 원평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농민군은 왕의 윤음을 가지고 온 이효응, 배응환 등을 공개처형하여 자신들의 투쟁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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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 생가

김덕명 생가터 전경 사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 용계마을원평은 금구취회의 중심지이자 집강소 통치기에 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의 접주 김덕명은 언양김씨 세거지인 금구현 두류면 거야마을 일대 (금산면 삼봉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금산사 입구 용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평의 동학접주로 활동하면서 1893년 원평집회에 적극 참여하였고, 백산대회 때에는 총대장 전봉준, 총관령 손화중, 김개남의 총참모로 추대되어 군량미 공급과 금구일대의 농민군 규합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황토현전투, 장성전투, 전주성 점령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집강소 통치시에 전주, 원평, 삼례, 광주, 남원 등지에 대도소가 설치되었는데, 김덕명은 원평에서 집강소의 핵심 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어 들였고 탐학한 지주를 응징하며 농민의 고통을 해결해 나갔다.1894년 11월 8일(양 12월 5일)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하자 동학농민군은 원평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김덕명은 전봉준보다 먼저 원평으로 돌아와 농민군을 소집하고 군량미를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은 11월 25일 벌어진 원평전투에서 승기를 잡지 못하고 태인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틀 후의 태인전투에서도 농민군은 패퇴하고 말았다.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뒤, 김덕명은 참담한 심정으로 전봉준과 헤어져 집안 재실이 있는 안정사 절골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의해 체포?일본군에 넘겨진 그는 서울에서 전봉준과 함께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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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평집강소

원평집강소 사진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학원마을(김영태 家)돈을 많이 번 백정(동록개)이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농민군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건물은 지붕만 초가에서 와가로 바뀌었을 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원평집강소 사진원평집강소 사진원평집강소 사진원평집강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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