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교조신원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으로 1892년 7월부터 10월까지 서인주,서병학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당초의 교조신원운동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으나 충청감사 조병식의 제김 (행정 결정사항의 통보)과 관리의 탐학을 금한다는 감결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결과 동학교도와 교단 지도부는 자신감을 얻어 이후의 삼례취회,광화문합상소, 보은취회,금구취회 등의 집회를 계속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충남 공주시 이인면 이인리
충남 공주시 신기동 효포
충남 공주시 계룡면 봉명리 판치 (널티)
충남 공주시 금학동
충남 공주시 금학동농민군은 우금치를 공격하는 한편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고개는 천혜의 요새로 계곡을 가득 메운 농민군의 시체만 남긴채 후퇴하여야 했다.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송장배미라는 논이다.
덕산을 공격한 농민군은 내처 홍주성까지 점령하려 하였으나, 일본군 장교 아카마쓰가 이끄는 일본군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해미로 물러나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의 고향이기도 한 홍주는 민종식, 이세영, 채광묵, 안병찬 등의 의병의 활동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1895년에 일어난 의병은 관찰사 이승우(농민군과 싸웠던 홍주목사)의 배신으로 실패했으나, 1906년에는 의병이 크게 일어나 홍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조양문에는 당시 의병과 관군이 격전을 벌인 총탄자국이 남아 있다.
충남도유형문화재 41호 / 충남 서산시 읍내동
사적 116호 / 충남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해미읍성은 천주교 박해로 유명한 곳이다. 내포지역의 농민군은 해미를 중심으로 태안,서산,홍성,덕산,예산 등지를 석권하였다. 그러나 11월 7일 관군의 공격을 받아 패함으로써 서산의 매현으로 이동하였다.
사적 201호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조양문은 충주성의 동문이었다. 덕산을 공격한 농민군은 홍주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해미로 퇴각하였다.
충남도지정기념물 92호 / 충남 논산시 중화동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한 동학농민군은 11월 15일 이곳 황화대에 재집결하여 여산접주 최난선이 이끌고 온 증원군과 합세하여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황화대 주위에 포진하여 세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관군과 일본에 맞어 항전하였으나 30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