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의 건물로는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근래에 와서 입구에 문루와 기념관도 복원·설치하였다. 기념관에는 농민군이 쓰던 칼이 전시되어 있고 진남관 안에는 이순신의 거북선도 원형의 모습을 살려 전시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연수상고로 사용한 적도 있다.
국보 304호 /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1하동,진주 등지에서 패한 농민군은 승주 선암사로 이동하여 전열을 정비한 뒤 여수좌수영을 여러차례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전남 나주시 금성동
전남도유형문화재 2호 / 전남 나주시 금성동
전남 나주시 소재
전남 나주시 소재
전남문화재자료 86호/전남 나주시 금성동
전남 나주시 금성동
전남문화재자료 132호 / 전남 나주시 금성동이곳에서 전봉준과 나주목사 민종렬이 비밀회담을 하였다고 전한다.전봉준은 1894년 8월 나주목사 민종렬을 만나 호남에서 집강소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나주에도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민종렬은 이를 거부하였다.
서적 397호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이방언 농민군은 장성을 점령한 뒤 그와 동문수학한 김한섭을 비롯한 관군을 패퇴시키고 강진을 장악하였다. 농민군은 군대를 강진병영으로 옮겨 강진병영 감관 김두흡이지키고 있던 이곳을 장악하였다. 김두흡은 지키고 있던 이곳을 장악하였다. 김두흡은 농민군에 맞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불씨를 안고 화약고로 들어가 폭사하였다.
서적 397호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서적 397호 / 전남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
전남 영광군 법성면법성포는 호남지의 세곡(稅穀)을 운반했던 조창이 있던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4월 12일 이곳으로 들어와 식량을 보급한 뒤 4월 16일 함평으로 진출 점렴하였다.
보물 132호 /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호리농민군을 추격하여 오던 홍계훈은 농민군이 장성과 나주방향으로 각각 진격해 갔음을 보고받고 대관 이학승에게 군사 300명을 영솔하게 하여 장성으로 급히 보냈다. 이학승 부대를 장성으로 유인하였던 전봉준의 황룡촌에서 격전을 벌였다.이학승의 선제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황룡촌 뒷산인 월평삼봉정상에서 대나무로 만든 장태를 굴리며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이학승을 비롯한 경군 (京軍: 중앙 정규군)을 제합함으로써 농민군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전남 장선군 황룡면 월평, 신호리일대월평산봉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던 전봉준의 농민군은 황룡장터에서 이학승의 경군을 맞아 싸워 승리하였다.
장성 황룡촌전투에서 전사한 경군대장 이학승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의 유생들이 세웠다. 비문은 최익현이 썼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선암사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은 낙안,보성,고흥 등을 석권하였다. 이곳의 농민군은 순천접, 고산접,남원접, 태인접,금구접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