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농민혁명 그 숭고한 정신을 꽃 피우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창지역 기념시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비
  • 동학농민혁명포고문비
  • 동학농민혁명기념탑
  • 농민군 고창주 추모비
  • 무장기포지 원경
  • 동학농민군 훈련장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마을 590번지 일원1894년 1월(음력)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로 내려와 잔혹하게 백성들을 진압하자, 전봉준은 일단 무리를 해산하여 이곳 무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당시 호남 최대의 세를 떨치던 무장의 손화중 포를 기반으로 전면적 봉기를 단행(음력 3월 20일)한다. 당시 무장현 동음치면 구수마을이었던 이곳 무장기포지는 사그라질 뻔했던 고부농민봉기의 불씨가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으로 다시 피어난 곳, 즉 '민란'이 '혁명'으로 발전된 의미 깊은 곳이다. 이 마을은 큰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마을'이라고 불렸는데, 마을 위의 아홉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것에 근거해 '구수' 혹은 '구시내'라고도 불렸다.이 곳에는 지난 1994년 건립된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비]와 [무장창의포고비]가 있으며, 2002년에 고창군에서 상징조형물과 [동학농민군 훈련장] 등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또한 무장의 농민군 접주로 1차봉기 때부터 전봉준을 보좌하면서 농민전쟁에 참가하였던 [고창주의 추모비]가 세워져있다. 그는 1895년 3월 3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무죄 방면되었으나 귀향도중 정읍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27일 포살당하였다.

전봉준 장군 생가

전봉준 장군 생가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 63번지 외 7필지전봉준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전북 정읍시 이평편의 조소마을(현재 전봉준 장군의 고택지가 조성된 곳)이라는 견해와 전북 고창군 죽림리 당촌이라는 견해에 논란이 많았으나, 근래 연구성과와 학술조사 등을 통해서 고창군 죽림리 당촌으로 확인되었다. 고창에서 무장 쪽으로 가다보면 죽림리 당촌마을이 나오고, 마을입구의 커다란 소나무와 모정을 지나면 왼쪽 언덕에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이 서당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는 서당터가 남아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전봉준의 생가는 2001년 고창군이 새롭게 복원한 것이며, 생가 1동과 헛간채, 안내문과 비석 등의 시설물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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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지역 기념시설

김덕명 장군 묘역

김덕명 장군 내외 묘역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장흥리 안정절골이름은 준상(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 본관은 언양이다. 1845년 10월 27일 금구군 수류면 삼봉리 거야마을에서 아버지 김한기와 어머니 파평윤씨의 장자로 태어났다. 김덕명은 금구·원평지역의 대접주로서 1893년 3월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보은집회가 있을 당시, 전라도 금구 지역에서 교도 1만여 명을 소집하여 독자적인 금구집회를 개최하는 등, 금구취당세력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금구토반인 언양김씨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었던 그는 전라도 일대의 접주들(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전봉준은 9월 2차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덕명의 금구·원평 도소를 군수물자확보의 거점으로 활용하였으며 공주에서 대패하고 밀려 내려와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 역시 이곳 원평(구미란지역)과 태인이다. 김덕명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1개월가량 은신하다 마을사람들의 밀고로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체포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김덕명은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 권설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51세로 최후를 마쳤다.김덕명 장군의 묘역은 1987년 후손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묘비에는 '의사언양김공덕명지묘'라고 씌어 있으며, 묘역의 아래쪽에 있는 것이 부인 이씨의 무덤이고, 위쪽에 둘레석이 있는 것이 김덕명 장군의 무덤이다. 원평 학수제 경내에는 그를 추모하는 추모비와 위령각이 건립되어 있다.

김덕명 장군 추모비와 위령각

김덕명 장군 추모비와 위령각

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180-2 (학수제 부지내)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중 가장 연장자였던 김덕명 금구대접주의 애국혁명정신을 추모하고,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희생한 수많은 무명동학농민혁명군의 영령들을 기리기 위해 1990년 학수제 동산에 위패를 봉안하고 위령각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매년 10월에 학수제 경로당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이곳 위령각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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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지역 기념시설

교룡산성

  • 동학농민군주둔지 표지목
  • 교룡산성

소재지 : 전북 남원시 산곡동 16-1문화재지정 : 시도기념물 제9호(1973.6.23)교룡산성은 남원시 서북쪽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3,120m이고, 현재 문지, 수구, 옹성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백제 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하였다. 동학창시자 최제우의 은둔포교지이자 수행지인 은적암이 있어 동학과 관련된 유지일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때에는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일대 농민군의 군사적 거점지였다. 김개남은 집강소 설치를 반대하는 남원성을 공략한 뒤, 교룡산성을 증축하여 남원의 외곽을 방비하고, 군수물자를 저장하며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7월 15일 전봉준과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의 내부결속을 강화하여 집강소통치를 더욱 체계화하는 한편, 본격적인 항일전의 성격을 띠는 2차봉기를 준비하기 위해 남원대회를 개최하였다.현재 교룡산성에는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둔지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으로 표지목만이 남아있다.


교룡산성 김개남 주둔지 사진교룡산성 김개남 주둔지 사진교룡산성 김개남 주둔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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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지역 기념시설

백산성과 동학혁명백산창의비

동학혁명백산창의비

소재지 : 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산 8-1외 40필 백산성지 내문화재지정 : 사적 제409호(1998.9.17)백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산성이 위치한 곳으로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마지막 항전지이자, 동학농민혁명 시에는 고부봉기 이후 흩어진 농민군들을 재결집하여 전봉준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대대적으로 봉기한 곳이다.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백산면이었지만, 1914년 부안군으로 편입되어 현재는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로 불리고 있다. 백산은 해발 47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이었지만 부안, 정읍, 신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주변 일대가 모두 넓은 평야로 이루어져 주위가 한눈에 들어오며 뒤편으로는 동진강이 흐르는 천연의 요새였다. 1894년 3월 20일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군 4천여 명을 본격적인 농민군 부대로 편성하고 호남창의대장소의 이름으로 격문과 농민군 행동강령을 발표했던 곳이다. 원래는 흰뫼산(심미산)으로 불리었으나 당시 온 산이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군들로 뒤덮여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현재 백산의 정상에는 1989년 11월에 건립한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서 있다.○ 백산창의비 [격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현재 교룡산성에는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둔지였음을 알려주는 흔적으로 표지목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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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지역 기념시설

전봉준 장군 피체지

  •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
  • 전봉준 피체지 전경
  • 전봉준과 농민군 동상
  • 전봉준 장군 피체 상황 조형물

소재지 :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 276번지전봉준은 태인전투를 끝으로 군대를 해산하고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정읍의 입암산성을 거쳐 12월 2일 이곳 쌍치면 피노리(현 쌍암리)로 숨어들었지만,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고만다. 체포된 전봉준은 순창으로 이송되어 곧 나주,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가 체포된 곳으로 혁명의 마지막 유적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최근에 회문산 관광자원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를 복원하고 압송로를 정비하였다. 주막과 부속건물, 전시실, 초정, 기념비와 기념조형물 등 기념시설이 조성되어 있는데, 전봉준 장군이 피체되는 과정을 익살스럽게 담은 조형물이 특히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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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지역 기념시설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대둔산항쟁전적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 23-3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관군 30명으로 편성된 부대가 대둔산으로 출동한 것은 1895년 2월 17일이었다. 토벌대는 이튿날 새벽 5시 공격을 개시하여, 어린 소년 1명과 28~29세의 임산부를 포함해 26명의 농민군을 살육하였다. 어린 소년을 제외한 25명 모두가 사살되었으며 접주 김석순은 한 살짜리 젖먹이를 안고 천길 계곡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고 전해진다.1998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원광대학교 사학과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대둔산 전투지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뒤,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저항했던 최후의 항전지이자, 유일하게 전투현장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50m 높이의 절벽에 방어를 위해 동학농민혁명군이 쌓은 돌무더기와 집터, 토굴 등 당시의 요새와 전투흔적들이 남아있다.동학농민혁명 최후의 항쟁지(대둔산)를 기념하고 희생된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완주군과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가 2000~2001년에 [동학농민혁명 대둔상항쟁전적비]를 조성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기념비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기념비

소재지 : 전북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찰방다리청·일전쟁의 승리를 이용하여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1894년 9월 동학농민군은 이곳 삼례에서 '척왜양창의'의 기치 아래 2차봉기를 단행했다. 일본의 범궐과 내정간섭 심화에 대항해 결행된 2차봉기(삼례봉기)는 우리나라 한일의병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1996년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삼례읍 삼례리 삼례입구의 도로변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 동학농민혁명봉기비
  • 추념의 장
  • 대동의 장
  • 선양의 장

소재지 : 전북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 276번지완주군이 전라북도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지원금으로 완주군 문화체육시설지구 내에 조성한 역사광장으로 2002년 12월 준공됐다. 1894년 9월의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이 역사광장은 돔 형태로 농민군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인 '추념의 장'과 농기구를 형상화한 '대동의 장', 판화형식을 빌려 동학농민혁명을 소개하는 '선양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정신을 독창적으로 잘 표현해 냈으며, 조형물과 조경의 조화 등이 잘 이루어져 삼례봉기의 체험적 공간을 훌륭히 구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기념시설이다. [동학농민혁명봉기비]와 상징조형물, 동학농민혁명 표지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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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지역 기념시설

동학혁명기념관

동학혁명기념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76-2천도교에서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전라도의 수부인 전주에 [동학혁명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은 정부 보조금과 교인들의 성금으로 1994년 말에 착공하여 1995년 5월 31일에 준공되었으며 97점의 사진, 47점의 공문서, 93점의 책과 사본 그리고 해월신사의 동상과 병풍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9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토요일은 12시까지 개관하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동학전적지 및 성지에 대한 코스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동학농민군 전주입성기념비

  • 동학전적지비
  • 동학농민군 전주입성기념비

소재지 : 전주시 완산구 완산칠봉 완산칠봉공원 내동학농민군 전주입성기념비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전주시 완산구의 완산체육공원 내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농민군은 4월 6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장성 황룡촌에서는 서울에서 내려온 왕의 군대(경군)를 대파하고 정읍, 태인, 금구를 거쳐 전주성으로 향했다. 농민군은 용머리고개로부터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으며, 4월 27일 전주성을 무혈점령하였다.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전라도의 수부를 점령했다는 상징적인 측면과 이후 전주화약을 통해 집강소 통치시기를 이끌어냈다는 실제적인 측면 모두에서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을 걸쳐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으로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장소이다.1991년 8월 전라북도 문화재위원회가 세웠고 전영래와 조병희가 글을 짓고 김윤길이 썼다. [전주입성기념비] 건너편에는 [동학전적지비]가 함께 건립되어 있다.

전봉준 선생상

  • 전봉준 선생상
  • 전봉준선생상,손화중,김개남장군 추모비

소재지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덕진공원 내전주 덕진공원 안에 세워진 [전봉준 선생상]은 1981년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 주관으로 건립되었다. 이상비 글에 이규진이 쓴 [전봉준 선생상]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전주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념조형물로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보다는 행동하는 유학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즈음해 동학농민혁명의 기념사업이 지나치게 전봉준 장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인식 아래 김개남 장군과 손화중 장군의 추모비를 차례로 조성하였다.

김개남 장군 추모비

김개남 장군 추모비

소재지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덕진공원 내김개남 장군 추모비는 1993년 5월 '김개남 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강희남 목사가 글을 짓고 신영복씨가 썼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지나치게 전봉준 장군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의 3대 거두인 김개남 장군과 손화중 장군을 함께 조명하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추모비 전면에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측면에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군군사어디두고 짚둥우리가 웬일이냐", 후면에는 "김개남을 추모하는 글"이 각각 새겨져 있다.

손화중 장군 추모비

손화중 장군 추모비

소재지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덕진공원 내손화중 장군 추모비는 1981년 전봉준 선생상과 1993년 김개남 장군 추모비에 이어 1998년 12월 건립되었다. '손화중 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건립이 추진된 추모비의 전면에는 "사람이 한울이다"와 "보국안민, 척왜척양"을, 후면에는 "손화중 장군 추모의 글"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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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지역 기념시설

전봉준 선생 고택지

전봉준 선생 고택지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458-1문화재지정 : 사적 제293호(1981.11.28)녹두장군 전봉준이 농민혁명 직전까지 생활했던 이 집은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 제 293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은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이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이다. 각지에서 유동생활을 했던 전봉준 장군은 태인 동곡에서 살다가,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 곳으로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며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생활하였다. 1970년에 지방문화재 19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가옥해체 및 보수공사작업을 마무리하여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전봉준 장군 묘역

  • 전봉준 장군 절명시 비
  • 전봉준 장군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산10-3전봉준은 1855년 전북 고창군 죽림리 당촌에서 아버지 전창혁과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2년 보은에서 교단중심의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될 때, 그는 금구에서 '척왜양'의 기치를 내건 독자적인 집회를 개최하며 농민혁명의 주도적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894년 1월 고부봉기 이후 무장의 손화중과 함께 대대적으로 3월봉기를 주도하였으며, 전주화약 이후 급진파 김개남과 달리 관과 상화하여 최초의 민중자치시기인 집강소통치를 실시했다. 일본의 범궐과 내정간섭의 심화로 9월에 2차봉기를 단행한 전봉준은 공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려 하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 1894년 11월 27일 원평 태인 전투를 끝으로 패주하던 전봉준은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옛 친구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된다.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거쳐 12월 18일 서울에 도착한 전봉준은 다음 해 5차례의 심문을 받고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갑오년(1954) 천안 전씨 문중에서 단비(壇碑: 유해가 없는 허묘)를 건립하였고,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 시 가묘를 함께 조성하였다. 110주년이 되는 2004년 5월 11일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단장하였으며, 비문에는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甲午民主倡義統首天安全公琫準之壇)을 새겨 넣고, 묘역 좌측에 [전봉준 장군 절명시비]를 세웠다.

김개남 장군 묘역

김개남 장군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 마을이름은 영주(永疇) 본관은 도강(道康)이며 1853년 9월 15일 정읍시 산외면 (당시 태인현) 동곡리 지금실에서 김대현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개남(介南 혹은 開南)이라는 이름은 동학에 입도하면서 얻은 별호이며 금구·원평과 더불어 호남에서 크게 세를 떨쳤던 태인지역의 토반 출신이다.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3대 장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관과 상화한 전봉준과 달리 집강소시기와 2차봉기 시 그가 보여준 과격한 행동은 그가 봉건세력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한 강경파였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2차봉기 시 김개남은 공주로 진격한 전봉준과 달리 청주 쪽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진영 싸움에서 잇달아 패하고 공주의 전봉준 주력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군대를 해산하고 도피길에 오른다. 그는 태인현 종송리의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있다가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기개에 놀라 1894년 12월 13일 재판도 거치지 않고 임의로 처형해 버린다. 그의 시신은 남원 일대에서 핍박받은 양반, 토호들에 의해 짓밟혔고, 일부는 그의 간을 꺼내 씹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이송되어 12월 15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되었다 다시 전주로 내려와 효시되었다.현재의 묘역은 1995년 후손들에 의해 조성된 가묘로서, 제단과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묘소 앞 좌우에 장군석이 배치되어 있다.

황토현 전적지

  • 황토현 전적지 정화기념비
  • 보국문
  • 전봉준 장군 동상
  • 갑오동학혁명기념탑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전경

소재지 :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2문화재지정 : 사적 제295호(1981.12.10)동학농민군은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고부봉기를 일으켰으나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10여 일 만에 해산한다. 그러나 정부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려 거세게 탄압하자, 전봉준은 무장의 손화중을 설득해 3월 20일 무장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한다. 이후 고부관아를 재점령하고 백산으로 본진을 옮긴 전봉준은 본격적인 농민군 대오를 조직하고 호남창의대장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한다. 이 소식을 접한 전주감사 김문현이 관군을 출동시키자 농민군은 정읍의 황토현으로 관군을 유인한다. 그리고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관군을 물리친 후, 승승장구하며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비롯한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 나아가 전주까지 장악하게 된다. 최초의 관군과의 전투인 황토현 전투에서의 승리는 동학농민혁명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황토현 전적지는 사적 제 29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전적지 내에는 1983년 한옥양식으로 건립한 [황토현기념관]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2002년 완공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조성되어 있고, [전봉준 장군 동상], [제민당], [제세문], [구민사], [보국문] 등 시설물이 함께 건립되어 있다.

손화중 장군 묘역

손화중 장군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상평동 산134 음성마을손화중은 1861년 6월 22일 정읍현 남일면 두교리에서 아버지 손호열과 어머니 평강채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의 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안존시킨 손홍록의 가계로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하였다. 20대에 처남 유용수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당시 영남지방을 휩쓸던 동학을 접하게 되었으며, 입교 2년 만에 고향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후 이웃 괴치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전봉준, 김덕명, 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들과 교유를 텄다. 손화중은 특히 선운사 도솔암 석불의 비결을 탈취했다는 소문으로 '장차 세상의 주인이 될' 인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전봉준은 당시 호남 최대의 세를 자랑하던 무장포의 손화중에 의지하여 무장에서 1차봉기를 일으킬 수 있었다.손화중은 2차봉기 시 나주와 장성 지역을 맡아 일본군의 후방교란에 대비했으나, 전봉준 주력군이 공주에서 패해 대세를 잃고 자신도 나주성 점령에 실패하자 군대를 해산하고 피신한다.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씨 제실에 숨어있던 손화중이 제실지기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아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함께 전해온다. 관군에 체포된 손화중은 1895년 3월 29일 전봉준·김덕명·최경선·성두한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1996년 손홍열 등 후손이 조성한 현재의 묘역은 손화중 장군 내외의 합장묘이나 손 장군의 시신은 거두지 못하였기에 가묘로 조성하였다. 비석 후면에는 손화중 장군의 삶을 자각하였다.

최경선 장군 묘역

최경선 장군 묘역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칠보면 축현리 산73-4이름은 병석(炳碩) 자는 낙필(洛弼)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1895년 11월 18일 태인현 서촌면 월촌리(현 정읍시 북면)에서 최성룡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최경선의 판결문에는 첫째, 전봉준의 모주(謀主)가 되어 도당을 모아 고부관아에 들어가 난동을 부리고 그 곳에서 전라감영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둘째, 정읍 등 여러 고을을 거쳐 전주에 들어가 전투를 벌일 적에 전봉준의 팔다리가 되었고 셋째, 전봉준이 2차봉기를 벌일 적에 그 경륜에 참여하여 도당을 모았다고 적고 있다. 최경선은 전봉준과 함께 사발통문거사에 참여하였고 4월 농민군의 백산결진 시에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받았다.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를 설치하는 시기에는 전봉준을 보좌하며 전라도 53군현의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최경선은 9월봉기 때 일본군이 나주해안을 통해 상륙할 것에 대비해 손화중과 함께 나주에 머물렀으나 전봉준이 공주, 태인에서 패하자 12월 1일 군대를 해산한다. 그는 남평을 거쳐 동복 벽성리에서 관군과 싸우지만 패하고 체포되어 1895년 3월 30일 37세 나이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처형되었다.원래 묘는 현 위치의 위쪽이었으나 1996년 9월 6일 최경선묘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현) 주관으로 묘역을 이장하고 정비하였다. 최경선 장군 묘역은 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진묘로서, 묘비명은 "동학농민군 영솔장 최경선지묘"이다. 농민군의 모습을 한 11개의 조형물이 묘역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발통문석과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탑

  •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탑
  • 동학농민혁명 영도자 동상
  • 전봉준 공원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쌍암동 392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여 정읍시가 국립공원 내장산 입구 [전봉준 공원]내에 [갑오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탑]을 건립하였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烏石)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主塔)과 부탑(副塔)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탑은 거창석(居昌石)이고, 높이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1,894㎝로 하였으며, 하단부는 3m씩 이다. 4각의 뿔은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의 이상(理想)을 상징하는 것이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투철한 정신(精神)을, 3단 금(金)태는 고부봉기, 3월봉기, 9월봉기를 각각 상징한다. 부탑은 문경석(聞慶石)으로, 직경이 85cm이고, 높이가 1,100cm인 원기둥 네 개로서 4민(四民:士農工商)평등의 수평사회(水平社會)를 상징한다.베니스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는 정읍 출신 작가 전수천이 제작, 1997년 5월 11일 준공식을 가졌다. 기념탑 이외에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장군을 기리는 [동학농민혁명 영도자 동상](2002년 건립)과 동학농민혁명의 주요사건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618[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은 1893년 사발통문거사계획이 작성되었던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주산마을(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대뫼마을)을 기념하고, 고부봉기에 참여했던 이름 없는 농민들의 뜻을 함께 기리기 위해 1994년 대뫼 녹두회관 앞에 건립되었다. 정읍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세운 이 탑은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안에 5미터 크기의 주탑과 주탑을 둘러싼 1~2미터 크기의 보조탑 32개로 구성되어 있다. 보조 탑에는 각각 무명농민군을 상징하는 얼굴과 무기로 사용했던 농기구 등을 새겨 놓았는데, 무명동학농민군을 기념하는 조형물로는 전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시설물이다.

동학혁명모의탑

  • 동학혁명모의탑
  • 동학혁명모의장소(사발통문작성의 집)

소재지 : 전북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1892년 4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온갖 수탈과 학정을 자행하자, 고부 농민들은 조병갑에게 진정서를 내고 호소하였으나 조병갑의 수탈과 탄압은 오히려 심해졌다. 이에 전봉준 등 20여 명이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대뫼마을(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가자는 혁명적인 모의를 결의했고, 이 내용을 담은 사발통문을 각 마을의 집강에게 보냈다. 이 같은 사실은 1968년 12월 4일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사람인 송대화의 아들 송후섭의 집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공개되었다.당시 송두호의 집에서 사발통문거사계획을 모의했으나 옛집은 흔적이 없고, 현재 임두영 씨가 그 집터에 살림집을 건축하여 거주하고 있다.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 거사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4월 마을 입구에 [동학혁명모의탑]을 건립하였다.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 유지비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17-1만석보 터 - 시도기념물 제33호(1976.4.2)고부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쌓은 민보(民洑)와 주변에 배들평야(이평)라는 비옥한 들을 가진 풍요로운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오년 당시 굶주리고 착취당한 농민들의 분노가 농민혁명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지역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상류에 민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하류에 신보를 쌓게 하고 보의 윗논은 1마지기에 2말, 아랫논은 1말씩 징수하여 농민들의 원성을 샀다. 또한 황무지에 과세하는가 하면 불효, 불목죄 등 애매한 죄목을 들어 재산을 빼앗는 등 갖은 폭정을 다하였다. 이에 1893년 11월, 12월 두 차례에 걸쳐 전봉준, 정익서, 김도삼 등의 고부군민이 수세 감면을 요청했지만, 도리어 체포·구금당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1천여 농민들이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의 지휘 아래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파괴해 버렸는데,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봉기이다.보는 당시에 파괴되어 현재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만석보 유지비]와 1987년 세운 [만석보 유지 기념비] 그리고 1999년 세운[만석보 시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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