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의 암흑속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어나다

경주지역 기념시설

해월 최시형 동상

해월 최시형 동상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황성공원 내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최시형은 경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861년(철종 12)에 동학에 입문하였다. 1863년 초대 교주 최제우에 이어 제 2대 교주가 되어,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 주요 경전을 발간하고 교의(敎義)를 체계화했다. 1892년 손천민, 손병희 등 교단지도부와 함께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충청도 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에는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왕에게 직접 교조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다시 보은 대도소에 전국의 동학교도들을 집결시켜 대대적인 집회를 벌인다. 1894년 3월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2차봉기 때는 기포령을 내려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공주전투에서 참패하고 패주하면서 피신하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으나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사람을 섬기되 한울 같이 하라." 하시던 해월 최시형 선생을 기리는 동상으로 최시형기념사업회와 천도교 측이 성금을 모아 1979년 9월 건립하였다. 신일철이 글을 짓고, 손경식이 쓰고 문정화가 새겼으며, 기단부 뒤편에는 건립문과 역사화를 담은 부조가 좌우에 각각 설치되어 있다.

목차보기

상주지역 기념시설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상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상

소재지 : 경북 상주시 상주산업대 맞은편 [소천교] 남쪽 끝상주는 영남 북서부 지역에서 잘 조직화된 동학농민군을 기반으로 세력이 가장 왕성했던 곳이다. 동학교단 지도부의 주요 거점이었던 충청도의 보은, 황간, 청산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상주는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토호들에게 보복적 징치도 서슴지 않았던 지역이다. 1894년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이 기포령을 발하자 상주 일대 농민군들은 9월 22일 상주와 선산관아를 접수하고 무기를 탈취, 무장을 강화했다. 상주와 선산지역 농민군들의 1차 공격목표는 교통의 요지에 전략적으로 설치된 일본군의 병참부였다.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상주읍성에 대한 선제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열세한 화력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상주에서는 향리들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 토벌에 나서면서, 상당수의 농민군이 희생되었다.상주 일원에서 희생된 동학농민혁명군의 원혼을 위로하고 혁명정신을 기리고자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시비 1,100만원을 지원받아 1996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상]을 건립하였다.

상주동학교당

  • 상주동학교당 원채
  • 유물전시관 입구
  • 용담유사 목판본

소재지 : 경북 상주시 은척면 우기리 728번지문화재지정 : 교당본부건물 5동 - 시도민속자료 제120호(1999.12.30), 유물(177종, 1084점) - 시도민속자료 제111호(1995.3.31)동학교의 남접주였던 김주희(1860-1944)가 1915년 상주지방을 본거지로 정하고 포교하다가, 1916년 지금의 자리에 교당을 신축하고 경천교로 등록한 후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곳이다. 건축 당시 초가흙집인 가옥을 복원하였으며, 현재 교당 내에 전시관과 영상실 및 휴게실이 증축되고 있다. 동학 관련 유물(용담유사 목판 등)을 보관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전시관이자 동학교도들의 정신적 성지이다. 원채와 사랑채, 안사랑채, 고방채, 행랑채와 구 유물전시실 등 5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 유물전시실은 현재 복수의 전시실과 영상실, 휴게실 등을 갖춘 기념관으로 증축 중이다. 용담유사 목판본, 제기, 전적, 인장 등 1,084점의 유물이 시도민속자료 제 11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목차보기

예천지역 기념시설

예천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비

  • 생매장터 비
  • 생매장터 비 후면

소재지 : 경북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공설운동장 앞예천지역에서는 향리층이 주도해서 농민군이 사용하던 이름 그대로 집강소(보수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을 견제하였다. 이처럼 서로 적대하는 군사력이 같은 지역에 형성된 결과, 각지에서는 농민군과 민보군 사이의 알력이 표출되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1894년 8월 9일 밤에 보수집강소가 동학농민혁명군 11명을 체포하여 화적 혐의로 한밤중에 한천강변의 모래밭에 생매장해 버린 사건이 그것이다. 살해된 11명은 금곡접 소속의 농민군이었으나, 농민군 지도부는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고, 민보군에게 수차례 통문을 보내 매살 책임자의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척왜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종용하였다. 그러나 보수세력들의 저항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 마침내 8월 28일 한천 제방에서 6~7천명의 농민군과 민보군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동학농민혁명 105주년을 기념하여 1999년 8월 28일 공설운동장 앞 천변가에 사각의 화강암 기단석 위에 흑오석 비석을 세우고 "동학농민군생매장터"라 새겼다.


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사진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사진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사진동학농민군 생매장터 사진

목차보기

다른도의 유적지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