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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토재전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6-20 조회수   1,296
내용
"황토재전투는 백산에서 전열을 정비한 농민군과 전주 감영의 선발대인 지방군이 벌인 첫 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거둔 승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1894년 3월 25일 백산을 출발한 농민군은 부안을 경유하여 6일 고부 도교산(道橋山 : 현재의 황토재 부근)에 진을 쳤다. 김개남의 농민군도 6일 도교산으로 진을 옮겨 전봉준·손화중의 농민군과 합류하였다. 전주의 길목을 지키며 농민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관군도 추격을 시작하였다. 농민군이 남하하자 4일 전주 감영의 중군(中軍)은 금구를 거쳐 태인으로, 원평 부근의 청도원을 지키던 정창권 등은 부안 줄포로 남하하였으며 4월 6일 무렵에는 황토재 아래 진을 쳤다.

도교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3대로 나누어 세 봉우리에 불을 놓고 감영군과 대치하였다. 7일 새벽 세 곳의 불 중, 가운데 봉화만 남고 양쪽의 불이 꺼지자 감영군은 농민군이 잠든 것으로 판단하고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감영군의 공격을 기다린 농민군은 양쪽에서 관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앞쪽에서 협공, 즉 삼면을 포위하여 감영군을 대파하였다. 농민군은 적절한 책략까지 쓰며 승리를 거둔 반면 감영군은 큰 피해를 입고 참패하였다. 전라도의 감영군은 농민군과 치룬 단 한 차례의 전투에서 차별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황토재전투의 농민군승리는 비록 지방군대이긴 하지만 정규군과의 첫 전투에서 거둔 큰 승리였고, 농민군은 기세를 올리며 전라도 일대로 세력을 넓혀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농민군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주는 이미 서울에서 내려온 경군(京軍)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더 북상하지 않고 남하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는 전선(戰線)을 넓혀 세력을 확대하려는 농민군의 뜻도 담겨 있었다. 농민군은 남하과정에서 어떤 지역을 공략할 때는 모이고 이동할 때는 흩어지는 전략을 폈다. 농민군 지도자들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절대적인 지휘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토대로 한 수평적 연합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세력구도상의 특성을 바탕으로 농민군은, 전봉준이 손화중과 함께 한 부대를, 김개남이 한 부대를 이끄는 가운데 하나로 합하거나 둘로 분산하면서 전력을 극대화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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