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역사속에 잠자던 이야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배너

  • 국민의소리
  • 자주묻는 질문과 답변
전시패널 내용 보기
제목 동학농민혁명 이후 각 세력별 동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6-20 조회수   1,953
내용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개화파 정부, 농민군, 보수유생층의 삼자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나타났다.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조선정부는 농민군을 찾아내어, 다시 조직화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모순을 개혁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거나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은 일본의 지원에 의해 추진된 갑오개혁이나 일본에의 예속화가 가중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농촌사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보수유생층을 핍박한 농민군이 보복을 당하였다. 그리고 개화파 정부의 근대화정책은 보수유생층의 입지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화파 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정부의 동학농민혁명 수습책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에 개화파정부 아래서나 광무정권 아래서 농민들이 안정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농촌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거나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전개한 세력으로는 동학당, 영학당, 남학당, 서학당, 화적당, 활빈당 등의 조직이 있다.
을미의병을 주도한 보수유생층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일본군과 조선정부를 도와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또 갑오개혁과 단발령 등 조선정부가 취한 근대화정책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숨어있던 농민군들은 일부 보수유생층이 주도한 의병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동학당의 경우는 북접의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900년경 동학교도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있은 이후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일부 동학교도들이 진보회·일진회를 결성하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조직들은 동학의 사상과 조직을 이어받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영학당은 서양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 전라도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손화중 포의 간부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재현을 위해서 조직한 것이다. 1899년 손화중 포의 새로운 세력지역이었던 전라도 고부, 정읍, 흥덕, 무장, 고창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이념, 목표, 방법을 동원하여 재봉기를 꾀하였다.

남학당은 동학당과 관련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동학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하여 충남과 전북 지역에서 포교가 이루어진 종교조직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농민군이 남학당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었다.

서학당의 경우 천주교와 야소교는 그 교리체계와 교단 조직이 확고하였고, 서양열강 공사관의 보호 아래 조직적으로 포교가 이루어졌다. 농민군이 이에 가입한 것은 정부의 탄압을 모면하고 치외법권적인 보호와 세력을 가지기 위한 것이었다.

화적의 활동은 조선후기부터 지속되어온 것이고 농민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농민군으로서 농촌사회에 정착하기 어려운 자들은 산속으로 피신하였다. 그들은 결국 화전민이나 화적이 되었다. 그런데 화적당에 많은 농민군이 들어가면서 조직과 방향이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반봉건·반외세의 이념을 가진 의적으로서 활빈당이 나올 수 있었다.
"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