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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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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동학농민군이 바라던 세상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6-20 조회수   3,253
내용
"동학농민혁명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각종 격문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경제적인 면에서 농민들의 요구는 조세 수취제도인 삼정을 바로잡는데 있었다. 삼정의 개혁에 관한 농민들의 요구는 집권층과 지방관리의 제도적 또는 불법적인 조세수탈을 중지하라는데 집중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농민들이 제기한 삼정 개혁의 문제는 개화파정권의 갑오개혁에서 상당부분 수용되었다.

또한 농민들은 상업 활동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주로 관과의 결탁을 통하여 특정 물건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하는 도매상인 도고의 철폐, 영세한 상인에 대한 지배층의 수탈 금지, 보부상과 외국상인으로부터 농촌의 영세한 행상들의 활동 보장, 외국상인들의 개항장 밖 활동금지 및 내륙으로의 상권 확대 억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일본상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옴으로서 영세 상인의 상업 활동은 더욱 악화되었고 결국에는 그 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었다.

사회적인 문제의 개혁 요구는 신분제의 폐지에 집중되었다. 물론 농민군이 신분제를 철폐하라는 공식적인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횡포한 양반과 수령을 비롯한 관속, 그리고 양반 지주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다. 그 처벌의 강도는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또한 농민군 사이에서는 신분의 벽을 없애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런 활동은 집강소 기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민군은 집강소기간 이전에도 서로 접장(接長)이라는 평등한 호칭을 썼는데, 집강소 기간에는 그것이 일상화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평민 이하 계층의 참여가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농민군의 신분타파운동은 점차 격렬하게 전개 되었다. 농민군은 양반 사족에게 모욕을 주거나 복수하였으며, 양반과 서로 접장이라 부르며 똑같이 예우를 하였다. 노비는 노비문서를 태워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정치적 문제에 관한 농민군의 요구는 민씨 정권의 축출과 탐관오리의 제거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이 다 드러났다고 볼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이 비록 1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전개되었지만, 농민군의 정치적 구상은 단계별로 변화 발전하였다. 정치적 지향점이 나타난 것은 3월 봉기 때, 집강소시기 그리고 재봉기 결정 과정에서이다. 전봉준은 임금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 사람을 절대 권력으로 추대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전봉준이 군주는 있으되 나랏일은 농민군이 행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정치형태, 즉 농민군이 참여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꿈꾸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함께 농민군의 정치적 지향의 큰 줄기는 외세(外勢) 축출이었다. 농민군은 3월 봉기 때부터 외세 축출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중심이 되는 주장은 아니었고 그 대상도 서양인 선교사와 일본상인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세축출이 본격적으로 쟁점이 된 것은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내정 간섭을 강화해 가면서 일본군이 제1의 적으로 떠올랐다.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반외세 항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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