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월 초 9일에 감사 김문현의 장계로 인한 조병갑의 복직은 많은 고부농민의 분노를 사게 된다. 전봉준은 10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예동마을을 비롯한 10여 부락의 풍물을 동원하고 예동에 걸꾼 수천 명을 모은 후 말목장터에 모여 조병갑의 폐정을 토로하고 농민들과 곧장 고부관아에 쳐들어가 아전을 징치하고 조병갑을 내쫒았다. 이후 조병갑 탐학의 원천인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다. 예동마을 입구에는 〈군수 안후길수 만석보혁파 선정비(郡守 安侯吉壽 萬石洑革罷 善政碑)〉가 서 있다. 1898년 새로 부임한 고부군수 안길수가 고부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를 혁파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고부 예동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이다.
고증내용
3월 26일 낸 태인현의 보고에서 "그날 유시 무렵 저들 무리들이 고부의 백산 예동에서 일시에 산을 내려와 본 읍의 용산면 화호 신덕정리로 옮겨 주둔하고 총을 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세력이 매우 커서 방어할 계책이 없다."고 합니다. 『수록』
이들 주모자들은 10일(양 2월 15일) 밤 배들평을 중심으로 10여 부락의 풍물을 동원해 예동에 걸꾼 수천 명을 모았다. 이때 전봉준은 조병갑의 학정을 일일이 들어 선언하고 고부관아로 쳐들어갈 것을 역설하였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① 봉기 – 전주성 점령」, 『역사비평』,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