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은 왜 농민군과 손을 잡으려했는가?

이이화 역사학자, 前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흥선대원군은 10년 동안 권력을 잡고 개혁정치를 폈으나 민비에 의해 죽지 부러진 매의 신세가 되어 운현궁에에서 유폐되었다. 그러면서 재기를 도모하려고 은밀하게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손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해 친위세력을 사자로 내세워 전봉준 등 지도자들에게 보냈고 이어 이들 사자들이 지방에서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개화정부를 타도하려는 활동을 벌였다. 이게 원활하게 진행되는 않았으나 일본 공사관과 개화정부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얽힌 일화들이 많이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이하응의 호칭을 흥선대원군으로 써야 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해 두자. 대원군은 왕자 또는 왕손으로 임금이 되지 못했으나 아들이 임금이 된 경우 조정에서 특별하게 우대해 붙여지는 존칭이다. 그러니까 대원군은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리해 그 앞에 특정 인물의 호칭을 별도로 붙여 구분해야 한다. 이하응을 그냥 대원군으로 부르지 말고 ‘흥선’을 붙여 표기해야 올바른호칭이 될 것이다.
전봉준과 해남소년이 운현궁에 나타난 사연
이하응은 왕족으로 낙백의 세월을 보내다가 어린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는 부정한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비리의 온상인 서원을 철폐하였고 경복궁을 재건해 왕실의 위엄을 높였으나 악화인 당백전의 발행, 며느리 민비와의 갈등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인기는 여전히 높았다. 이런 현실조건이 이하응과 전봉준의 관계가 자연스레 설정되었다.
전봉준은 청년시절부터 변혁을 꿈꾸고 많은 동지를 규합했다. 그는 향촌지식인으로서 곳곳에서 훈장을 하면서 개혁에 관한 지식을 쌓기도 했다. 그가 강진일대에 떠돌던 정약용의 저서인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읽었다고도 전해진다. 어느 때에 그가 서울에 올라와서 흥선대원군을 만나려 운현궁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유폐되어 바깥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했다 한다. 시골 선비인 전봉준은 운현궁 사랑채에서 며칠 동안 식객노릇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고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궁리만 짜고 있었다 한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점이 두어 가지 있었다. 첫째는 키가 유달리 작았다는 것, 둘째는 형형한 눈빛으로 사람을 쏘아보는 점일 것이다.
어느 날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은밀하게 불러 지긋이 바라보면서, 손바닥에 강(江)의 글자를 써서 보이면서 전봉준을 쏘아보았다 한다. 아하, 이게 무슨 뜻이람. 뒷사람들은 이를 두고 ‘그대가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오면 내가 호응하겠다.’라는 암시였다고 풀이했단다. 전봉준은 빙긋이 웃고 돌아왔다는 일화.(민속사학자 김화진 증언)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 유폐되어 있을 때 부엌에서 화약이 터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더욱 경비를 삼업하게 펼쳤고 흥선대원군은 사랑방에 거처하지 않고 좁은 침방에 거처하였는데 이방에는 한석진 등 측근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한다. 운현궁 넓은 경내에는 장명등을 밤새 켜서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건장한 소년이 긴 칼을 꼬나들고 송정(松亭)에서 계단을 따라 앉은걸음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호위하던 사람들은 칼을 빼들기도 하고 엽총을 꼬나들고 뛰어나가면서 ‘네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멀리 던지지 아니하면 총을 쏘겠다.’라고 소리 지르자 놀라 칼을 내던졌다.
이들은 그 소년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삼끈으로 묶었다. 묶긴 소년을 뜰 위에 꿇려 앉히고 신문을 하자 그 소년은 묶인 게 너무 아프니 조금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투가 전라도 사투리여서 전라도에서 온 소년임을 알아차렸다. 그 소년은 결박을 풀어주지 않자 힘을 주어 끊어버렸다. 다시 묶으려 하니 그 소년은 달아나지 않겠다고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대꾸했다. 그 소년은 전라도 해남에서 살고 있는데 장사하려 서울에 왔다고 말했고 누가 운현궁에 보냈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일 없이 밤중에 운현궁에 무엇하려 들어왔겠으며, 보낸 사람이 있으면 내 입으로 그 사람을 발하란 말이오? 죽일 죄면 죽이지 더 묻지 마시오.”
뒷전에서 이를 본 흥선대원군이, 그 소년을 놓아 보내라고 분부해서 그 소년은 풀려났다 한다. 이 소년은 운현궁에서 풀려나온 뒤 좌포도청에 잡혔다. 민가네 하수인들이 그 소년을 끌고 가서 죽였다 한다. 이 사실을 전해 준 윤효정은 운현궁을 지키던 한석진과는 친구사이였다. (윤효정, 한말비사) 이 소년은 바로 전봉준이 보낸 사자일 것이다. 전봉준은 거사를 앞두고 이를 운현궁에 알리려 한 게 아닌가? 이를 알아차린 민가네가 잡아 죽인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흥선대원군은 ‘그랬겠지’라고 말했다 한다.(위의 두 일화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밝힌 내용이다.)
일본의 이용물이 된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사진출처 : 화보헌정오십년사(1939년)
일본공사인 오토리는 경복궁 점령의 음모를 꾸민서 각본대로 운현궁으로 달려가 흥선대원군에게 경복궁으로 가자고 유인했다. 이 언저리에는 이미 일본 낭인패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결단을 못 내리고 주저하는 흥선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유인했다. 이 말에 흥선대원군은 짐짓 거부하는 척하다가 마지못한 척 위의를 차리고 말에 올랐다. 흥선대원군과 오토리 공사는 11시쯤 일본군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면서 경복궁 안으로 들어왔다. 오시마 여단장도 오후 5시쯤에 경복궁으로 들어와 고종을 직접 뵈웠다. 오토리는 고종을 뵙고 다음과 같이 말을 나누었다.
오토리 : 놀라실 것 같아 문후하려 들어왔습니다. 지금부터 개화한다면 두 나라의 교린이 예전보다도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고종 : 나는 손상을 입지 않았소. 두 나라가 한 나라처럼 보아 함께 교린의 의를 닦는다면 실로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길이 될 것이오.
보아다오, 이 대목을 보아다오. 독자들은 이제까지 한 편의 저질 드라마를 감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줄거리는 더욱 저질스러웠다. 일본은 조선 병사들이 일본군을 향해 먼저 발포했다고 말하면서 먼저 도전한 건 자기네들이 아니라는 변명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경복궁 점령과 고종 유폐는, 부정한 세력인 민가네를 조정에서 몰아내고 농민군이 떠받드는 개혁적인 흥선대원군에게 섭정(攝政)을 맡기면서 조선의 독립과 개혁을 보장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이를 은폐하려는 짓도 벌였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일본 기록에서는 왜곡해 서술했고 공식 보고에도 사실과 어긋나게 기록했으며 신문에도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통제했다. 일본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고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 병사들이 궁궐에 들어왔다. 이날 새벽 일본 병사 2대대가 영추문으로 들어오자 시위 병사들이 발포를 해서 이들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임금이 이를 말리라고 분부했다. 일본 병사들이 드디어 궁궐 문을 지켰다. 오후에 각 병영에 가서 그들 무기를 거두어 갔다.”
(고종실록 31년 6월 21일자)
이처럼 짤막하게 기재하면서 얼버무리며 은폐하려 했다. 고종은 그렇다 치고 흥선대원군은 일본이 내민 손을 잡고서 자신의 상징적 상표인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는 어디에다가 팽개쳤는가? 바로 자신과 원수 사이인 민비의 날개 죽지를 꺾고 아들 고종을 다시 턱짓으로 부려 보려는 욕망 때문에 ‘역사를 그르친 못난 정객’으로 떨어진 것이다. 고종과 민비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벌벌 떨었던 것이다. 경복궁을 점령한 뒤 일본 공사관에서는 고종과 민비의 탈출을 막으려 궁궐을 철통 같이 에워쌌다. 이어 일본군은 궁중의 경회루에 궁내본부를 설치하고서 궁내 수비병만이 아니라 도성의 방위를 맡은 서울과 수원의 조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개화정부와 손을 잡았지만
경복궁을 점령한 다음 날, 오토리 공사는 짜인 각본대로 신속하게 신내각을 꾸려 새 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구상과 오토리의 의견을 토대로 해서 일본공사관 서기관인 스기무라(杉村濬)의 구체적 방법을 기본으로 해서 진행되었다. 그러니 머뭇거릴 일도 없었고 시끄럽게 논란을 벌일 일도 없었다. 노회한 흥선대원군은 파도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본디 일본정부는 농민군이 전주에서 물러난 뒤 청국정부에 조선 내정의 개혁안을 제시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물러가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러나 청국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로 내세운 건, 이미 농민군이 해산해 굳이 두 나라 군대가 진정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 조선의 개혁은 조선정부가 알아서 할 것이며 청국은 일찍부터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일본도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고 있는데다가 내정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것, 내란이 이미 진정되어 외국 군사는 천진조약에 따라 철수해야 한다는 것 등을 들었다. 그 속셈은 접어두고라도 일단 이 회답이 그럴듯하기는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해 일본정부는 내밀하게 청국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하고서 새 조선 정부의 수립을 지시했던 것이다. 새 정부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 광화문 앞에 있는 의정부에서 처음 회의를 열었다. 이 기구는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5.16쿠데타 이후 발족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사생아는 잘 자랄지 두고 볼 일이다.
아무튼 군국기무처는 조선의 공식 정부기구가 아니면서 입법과 여러 정책을 만들어 내서 실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책임자로는 총재와 부총재 각 1명씩, 회의원은 16명에서 20인 정도를 두게 구성했다. 초대 총재는 영의정인 김홍집이 겸임했고(후기에는 내각 총리대신으로 바꾸었다) 회의원은 앞뒤시기를 포함해 1기(1894년 6월-11월 사이)에는 대체로, 박정양 민영달 김종한 김가진 김윤식 조희연 이윤용 유길준 어윤중 신기선 등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머저리 이준용도끼어들었지만 대체로 온건 개화파로 일본의 정책에 동조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전통적 전제 왕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폈다. 흥선대원군도 아들과 며느리의 입김을 빼려 이런 분위기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서 왕조의 군주인 고종은 아무런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고 최종 결제만 하고 눈치를 살피면서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흥선대원군의 입김이 스며들어 있어 회의원은 두 파 곧 흥선대원군파와 김홍집파로 나뉘어져 있었고 갑신파, 친미파, 궁정파도 있었다. 김홍집파는 김옥균 계열이 아니라 온건개화파로 성격이 느려터진 게으름뱅이들로 기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초기에는 급진개화파로 일본에 망명해 있는 박영효가 참여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끼어들어 내무대신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내무협판(차관급)의 자리에 있었는데 박영효는 이준용을 내몰아서, 이로 해 그나마 흥선대원군 세력은 소외되었다.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밀사를 보내다
흥선대원군의 사자가 남원에 와서 김개남을 만났을 때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감옥에 가두었다 한다. 또 승지 이건영이 와서 임금의 분부라고 하면서 ‘군사를 풀지 말고 힘을 합해 왜를 토벌하라.’라고 하자 김개남이 공손하게 예우했다고도 한다. 또 서장옥이 운현궁에 숨어 있다가 흥선대원군의 비밀 편지를 들고 와 ‘지난 번 해산하라고 효유문을 보낸 건 왜의 협박 때문이니 믿지 말고 군사를 정비해 북상해서 함께 국난에 나아가라.’라고 했다 한다. 황현은 이런 얘기는 적당들이 민심을 현혹하려 와언을 퍼뜨렸지만 백성들은 이런 말을 믿었다고 기록했다.
전라도 여산부의 선비인 양평의 개인 문집 춘당록(春塘錄))에는, 흥선대원군의 밀사로 알려진 소모사 이건영에 관련 내용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적혀 있다. 이건영이 농민군과 합세해 일본군에 대항해 몰아낸다는 사실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필사본인 이 사료는 필자가 처음으로 발굴했다) 또 그 자신이 소모사 이건영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이건영이 농민군과 손을 잡으려 하자 이를 반대한 사정을 적고 있다. 일본군 정토사령관인 미나미 소시로(南小四郞)는, 여산부사 유제관이 농민군과 내통하거나 도와주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체포해 재판에 회부했는데 여기에 유제관의 활동상이 단편적으로나마 담겨 있다. 여기에 소모사를 보낸 건,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써 몽둥이를 만들어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를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일려주고 있다.
그러면 이건영은 누구인가? 이건영은 비록 임금의 유지를 가지고 현지에 왔으나 흥선대원군이 보낸 밀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와서 전봉준 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자들을 만나 남쪽에서 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해 오면서 일본군을 타도하라는 밀령을 받았다고 한다.(황현의 오하기문 등 참고할 것) 이런 내용이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또 여기에는 여산부사 유제관도 이건영이 포섭했다는 분위기를 깔고 있다. 유제관은 동학농민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일본군에게 잡혀 서울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어 전녹두와 김개남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와 청주로 진격한 사실을 적고, 자신이, 이들은 비도들이니 손을 잡지 말고 훈신(勳臣)의 자손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는 게 합당하다고 주장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자 이건영은 ‘용병의 법도는 성인의 도와 다를 게 없으니 권도(權道, 임시방편의 길)를 행하여 마땅함을 얻는다면 또한 시중(時中)인 것이오. 지금 이 시기에 비록 불러 모으려 하더라도 어찌 한 사람이라도 모집에 응하는 자가 있겠소? 지금 이 군사들 가운데 사대부의 선비와 훈신의 자손이 아닌 이가 없는데 이들을 제쳐두고 어찌 다른 데서 구할 수 있겠소?’라고 하면서 타이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건영이 농민군과 합세해 일본군 제거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건영은 흥선대원군이 보낸 사자임은 분명하고 그의 주장은 바로 흥선대원군이 추구한 현실적 방안이었다. 이건영이 호남으로 내려와 전봉준과 김개남을 만나 설득을 편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전봉준은 일본 영사관 심문에서,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를 적극 부인하고서 ‘흥선대원군은 유세한 자이므로 나와는 결단코 상관이 없다’라고 강력하게 부인한 건 흥선대원군과 그 세력을 옹호하려는 뜻일 것이다.
손자도 역적으로 몰렸다
전봉준이 재판을 받을 때 흥선대원군은 일본영사관이나 법무아문에서 한 차례도 문초를 받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금상(今上, 현재의 임금)의 아버지였으니 무슨 큰 혐의가 있더라도 함부로 문초할 수 없었고 민심의 동향도 엿보아야 했다.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죽치고 앉아 저간의 동향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와 달리 권설재판소에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판결이 끝난 뒤 법무아문 특별법원에서는 마무리 작업이 전개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이 농민군과 손을 잡고 역모를 일으키려한 사건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 재판선언서에서 이렇게 기재했다.
피고 이준용은 작년 6,7월쯤에 동학당이 곳곳에서 봉기해 인심이 흉흉한 때를 타서 피고는 박준양 이태용의 계획에 찬동해 한기선 김국선과 은밀하게 밀의하고 곧 동학당에게 통모하여 경성을 습격하라 하되 경내의 인민이 놀라 대군주 폐하가 난을 다른 곳으로 피하실 것이니 그때를 타서 한쪽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병대로써 대군주 폐하와 왕태자 전하를 시해하고 한쪽으로는 그의 수하인 흉도를 지휘하여 정부 당로자 중에 김홍집과 조희연과 김가진과 김학우와 안경선과 유길준과 이윤용 등을 살해해 정부를 전복하며 왕위를 찬탈하기를 모계해 이 일이 성취된 뒤 피고 이준용은 왕위에 오르고....
이 역모사건에 연루된 인사들 중에 이준용은 종신 유배형, 박준양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 등은 각각 교수형에 처했다. 여기 재판장은 서광범, 판사는 장박이었다. 이 사건이 얼마만큼 사실인지 모를 일이나 농민군 지도자의 처형과 함께 다루어 결말을 지은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전봉준과 이준용이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준용은 24세였다.
그 뒤 이준용은 2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이준용은 운현궁에서 태어났는데 흥선대원군의 종손, 고종의 장조카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죽은 뒤 운현궁의 별관인 화려한 양관(洋館)에 살면서 운현궁의 새 주인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결국 일본이 주는 훈장을 받으면서 친일파가 되는 비극을 낳았다.
흥선대원군과 전봉준, 운현궁과 이준용에 얽힌 얘기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흥미 있는 소재를 던져주고 있다 하겠다.
이이화 | 역사학자,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고구려역사문화재단 상임공동대표, 서원대학교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서 한국 고전 번역과 편찬에 힘을 기울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이 반란사건으로 인식되던 198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 역사바로세우기에 헌신적으로 나서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창립과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전국화를 견인하였고, 그 결실로 제정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동학농민혁명 인물열전』, 『전봉준, 혁명의 기록』, 『못 다한 한국사 이야기』,『허균의 생각』,『조선후기 정치사상과 변동』등 100여 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