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식 선생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의 세 기둥:추적·고증·증정
한국사학연구소
노용필
최현식 선생은 평생 동안 동학농민혁명사 연구에만 오로지 심혈을 기울여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대표적인 저서로 남겼는데, 그것도 1980년에 단 한 번으로 그치고 만 게 아니라 재판·3판을 1983·1994년에 거듭 출판하여 연구에 철저를 기함으로써 학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불후(不朽)의 연구를 떠받치고 있는 탄탄한 기둥은 추적(追跡)과 고증(考證) 그리고 증정(增訂) 셋이라 꼽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러한 사실은 재판의 「증정발(增訂拔)」에서, “초간이후 수년 동안 수집한 자료를 증정판으로 정리하는데 있어 특히 전남지방의 유적답사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 지금 전봉준의 출생지는 전주·고창·정읍(태인) 등으로 구구했으나 그동안 필자가 추적한 결과 그가 고창읍 당촌리 출생이라는 고증자료를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음에서 극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다. 끊임없는 유적답사를 통한 추적, 그래서 얻게 된 새로운 자료를 토대로 한 고증 그리고 이를 반영하여 앞서 낸 저서의 내용을 수정하고 보강하는 열정적인 증정작업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현식 선생은 다른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에 대한 추적에 대해 애초부터 강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같은 점은 초판의 「자서」에서 이미 “해가 갈수록 인멸되어 가는 귀중한 자료의 발굴과 보존하는 문제는 국민이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음에서 고스란히 우러나오고 있다. 특히 인물 자료의 수집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게 되면 이를 토대로 고증을 하여 기왕에 자신이 집필한 부분을 수정하기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1994년 3판을 펴내면서 작성한 「증정발」(2)에서 “인물자료의 수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나 인물사료는 우리 세대가 꼭 밝혀내야 할 하나의 과제라 생각한다. 무명선열의 자취라도 기록화하자는 뜻에서이다. 그리하여 본 인물지에서는 후손들의 구전자료도 고증으로 하여 수록했다는 점을 미리 일러두는 바이다”라고 명시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선생이 이 3판을 출판해내던 1994년은 주지하듯이 꼭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되던 해였으므로, 인물 자료의 수집이 아무리 힘든 작업일지라도 자신이 해내지 못하면 자취조차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우리 세대가 꼭 밝혀내야 할 하나의 과제’로 다짐하고 이 작업에 매진하여 결국 결실을 맺어냈던 것이다.
이렇듯이 추적·고증·증정이라는 세 기둥으로 떠받쳐진 최현식 선생 필생의 저서『갑오동학농민혁명사』가 지니는 학문적 가치는, 따라서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빛나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 관련하여서는, 1980년 초판에 함께 실린 신석호(申奭鎬)의 「서」에, “… 과거 우리가 하지 못한 갑오동학혁명사를 상재하고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기뻐하며 불문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이 글을 쓰는 바이다. … 전국적으로 확대된 애국적 혁명운동 전체를 상세히 기술한 것으로서 갑오동학혁명운동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발간된 동학혁명운동사라는 데에 또한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라고 적은 바가 주목된다.
당시 한국사학계의 원로로서 적지 않은 업적을 쌓아 명망이 높았던 역사학자 신석호 선생이 이처럼 ‘우리가 하지 못한 갑오동학혁명사를 상재’하여 ‘최초로 발간’하였다고 인정한 것은, 최현식 선생의 『갑오동학농민혁명사』가 지니는 학문적 가치가 매우 컸음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1980년의 초판만 하더라도 이와 같을진대, 이후 거듭해서 재판·3판을 출판해냄으로써 최현식 선생이 『동학농민혁명사』의 완성을 추구하며 더욱 철저히 사실을 밝혀내려 진력하였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높이 평가되어 역사 속에서 길이 전해질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