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 풍암리 동학농민군 전적지를 가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전상욱
일반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생각할 때 강원도 지방의 사정은 시발지었던 전라와 충청 지방의 사정보다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동학농민혁명보다 30여년 앞서 1862년에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72개 고을에서 농민들이 치열하게 반봉건 농민항쟁을 일으켰을 때 강원도에서는 비교적 잠잠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유독 강원도 지역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물살에서도 빗겨나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동학농민운동이 한창이던 개항 이후 사회모순이 깊어지면서 강원도에서도 농민항쟁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1869년 3월부터는 2세 교주 최시형이 강원도에도 동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동학이 전파되고 항쟁의 전통이 쌓여가면서 고립 분산되어 있던 강원도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묶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당시 강원지역의 최대 격전지였던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 일대를 잠시 눈에 담기로 하고 홍천행 버스에 올랐다. 애초 봄 산행에 잠시 겸해진 발길이었던 터라 우선 아미산 군립공원의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느리고 완만하게 산을 타며 넉넉하게 주변 풍광을 즐기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나온 이들이 산어귀에 드문드문 몰려 있었고, 산에서 뿜어나오는 공기는 언제나처럼 기분 좋게 알싸했다.
한 시간여, 적당히 땀이 베어나올 만큼 흙길을 올라 산정에서 풍암 들판을 굽어보자니 잠시 낯 뜨거운 숙연함이 몰려왔다. 들판이라곤 하지만 곡식이 디딜 자리로도 부족해 보이는 이 좁은 산야지대에서 수천의 농민군이 한 날 한 시 한뜻으로 집결하였다가 가을들판 볏단처럼 우수수 쓰러져갔을 것이다. 나라의 아래쪽, 너른 평야에서 타오른 동학농민혁명의 거센 불길이 강원도 산골까지 치붙은 자리였다.
시간을 너무 지체한 듯해 효제곡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 서둘러 길을 찾았다. 우체국과 노인회관 건물이 보이는 마을길로 들어서 서석면 사무소를 뒤로 지나니 곧바로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적지라는 자작고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미산, 고양산, 백암산, 흥정산, 운무산, 수리봉 등 이름도 못외울 여러 산봉우리들이 사방으로 병풍을 둘러친 가운데 아늑하게 자리해 있는 곳이었다.
이 근방 풍암리와 검산리 생곡리 일대의 곳곳은 지금도 나이 지긋한 지역 주민들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의 무덤자리였다던가, 그 시절의 천주당 터였다는 증언들이 전해진다고는 하지만, 여느 산자락의 들판처럼 너무나 고요하고, 야트막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여 평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풍경에 일면 참혹하기도 한 역사적 사실이 외려 비사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늘로 뻗어 있는 하얀 위령탑과 사건에 비해 너무나 단출해 보이는 전적비만이 이곳에서 몰살된 800여 농민군의 핏빛 숨결을 달래주고 있었다.
전국적 민중항쟁으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이 활발한 가운데서도 유독 강원도 지역에 대한 인식도가 낮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비단 홍천뿐만 아니라, 당시 강원도 지역의 지형적 특성과 인구 분포정도를 고려해 보면, 풍암리 전투에 참전한 농민군의 수적 규모가 다른 지역의 전투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해서 사건의 역사적 의미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논의할 때, 손쉽게 절대적 숫자만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안목은 언제나 위험의 소지가 있기 마련이다.
비록 국가사적지로는 지정받지 못했다 하나, 지자체 차원에서 뒤늦게라도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이념을 전승하고자 역사공원 조성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하니 기대해 봄직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