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강원도 홍천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고석주’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배항섭
경기도 지평에서 일어나 강원도 홍천서 활약
고석주(高錫柱, ? ~ 1895.3)는 경기도 지평 출신으로 강원도 홍천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이다. 그가 원래 거주하였던 지평현은 1차 봉기 당시에는 뚜렷한 활동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1894년 9월 들어 고석주, 이희일, 신창희 등이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활동하면서 경기도 동부, 강원도 영서 지역이 동학농민군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석주는 2차 봉기가 일어날 즈음 지평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윽고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강원도 홍천 지역까지 진출하여 접(接)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침 강원도 홍천 지역에는 강원도 농민군 중 큰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차기석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은 이내 동학농민군의 세상이 되었다.
전(前) 감역(監役) 맹영재와의 사투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고석주와 같은 지평현에 거주하였던 감역(監役) 출신인 맹영재가 이들을 토벌하러 온 것이다. 맹영재는 감역 출신인 것으로 보아 관군의 입장에서 반농민군 활동을 펼치려던 자였던 것 같다. 1894년 9월 하순 경, 맹영재는 부약장(副約長, 향약 단체의 우두머리)이 되어 포군(砲軍) 100여 명을 이끌고 홍천에 도착하여 고석주가 이끄는 동학농민군과 맞닥뜨렸다.
이 전투에서 고석주 등은 비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그 수가 수백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훈련된 포군을 당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이때 당장 죽은 자가 5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버려진 창이 58자루에 달하였다. 고석주가 맹영재의 손에 사로잡힌 것은 물론이다. 이때 흩어진 나머지 무리들 중 일부는 충청도 충주의 황산충의포로 갔다고 한다.
서울로 압송된 ‘혁명군 수령’
맹영재의 손에 붙잡힌 고석주는 곧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1894년 10월). 이때 같이 압송된 자는 충청도의 최한규, 정원준, 김복용, 이희인, 그리고 경기도의 안승관, 김내현 등이었다. 이들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를 아우르는 중부권을 중심으로 활동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었다. 이는 그만큼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양상으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을 때 모여든 군중들은 이들을 일컬어 혹은 ‘전라도 동학군 괴수들이다’, 혹은 ‘역적거괴들이 잡혀온 것이다’, 혹은 ‘창의군 대장이 잡혀온 것이다’, 혹은 ‘혁명군 수령’이라는 둥 수군거렸다고 한다. 역적부터 시작하여 창의군, 혹은 혁명군 수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보는 시각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이윽고 고석주를 비롯하여 압송된 이들은 모두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곧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때가 바로 1895년 3월이었는데, 대표적인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도 죽음을 같이하였다. 고석주도, 전봉준도 이들은 모두 같은 교수형을 당하였다. 반면 고석주를 사로잡았던 맹영재는 이후 그 공으로 지평현감을 제수받았다. 역사 속의 운명이 엇갈린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