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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4호
배들평야에서 만난 갑이

  배들평야에서 만난 갑이


노은 (소설가)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화장을 글로 배웠습니다, 라는. 실제로 배우지 않고 글로 배워서 서툴고 어색하고 형편없다는 말인데요. 나는 가끔 그런 말을 합니다. 요리를 글로 배웠습니다, 라고요. 요리라고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음식 솜씨가 서툴고 어색하고 형편없어서 변명삼아 그렇게 말합니다. 글로 배워서 맛까지는 책임질 수 없다고요.


  ‘나와 동학농민혁명이야기’라는 글을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 내 맘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사람으로 배웠습니다.’라는 첫머리가 조르르 떠올라서 혼자 피식 웃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동학농민혁명은 ‘사람’과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학창시절에 ‘동학농민혁명’이 아닌 ‘동학난’이라고 배웠던 나는 동학농민군을 할아버지로 둔 후손과의 만남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난 그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도 자신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초저녁 하늘에 부지런히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지는 눈썹달 같은 사람입니다. 미인의 눈썹을 닮은 눈썹달은 음력 초사흗날 저녁에 서쪽 하늘에 나지막이 떴다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슬며시 사라집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닌 눈썹달처럼 그 사람도 보이지 않는 어디선가 부지런히 제 몫을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연둣빛 봄빛이 아른아른 피어오를 때, 그 사람과 함께 유적지를 돌아보며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더듬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발통문 작성지에 갔을 때 사발통문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의 할아버지는 어디쯤 앉아 계실까 하고 재미삼아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전봉준 장군 곁에서 종이를 반반하게 잘 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그분이 할아버지일 것 같다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묵묵히 먹을 갈고 종이를 반반하게 펴는 일을 하셨을 거라고요.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엽전이 가득 찬 단지는 엽전이 들어갈 때 조용하고 병에 찬 물은 휘저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진정한 동학농민군의 후손입니다.


  그 사람과 함께 유적지를 돌아보다가 배들평야를 바라보면서 내 맘에 떠오른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좋은생각’ 사이트에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이고 주인공인 ‘갑이’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 ‘갑이’는 구한말 동학농민혁명이 배경인데요. 소작인의 아들 갑이와 양반집 애기씨 솔아기의 애틋한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혁명처럼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을 안타깝게 그려나가는 중입니다.


  주인공 갑이는 겁쟁이에 완전 소심한 순딩갑이입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아버지를 잃고,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솔아기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솔아기를 사랑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고민하는데요. 동학농민혁명에 휩쓸리며 동학에 대해 배우게 되고, 진정한 동학농민군이 되어갑니다.


  갑이 혼자 소설을 이끌어갈 수는 없겠지요? ‘갑’이 있으면 ‘을’이 있듯이 갑이의 동생 을이도 등장합니다. 갑이의 동생 천방지축 부룩을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처음에는 관군의 편에 서지만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통해 다시 태어나 갑이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받습니다.


  동학농민군의 꿈을 상징하는 솔아기는 어릴적 소꿉동무인 갑이를 사랑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 사랑을 이루려 하지만,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갑이를 두고 서울 외가댁으로 떠나는데요. 갑이의 누이동생 별이를 친동생처럼 아끼며 보살핍니다.


  갑이의 누이동생 귀요미 별이는 어릴 적 귓병을 앓은 후 귀가 잘 들리지 않으나 영리하고 귀여운 소녀이고요. 솔아기와 함께 서울로 떠나는데, 갑이와 을이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룰 수 있는 인물이지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려는 솔아기의 사랑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농민군의 꿈을 상징합니다. 갑이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미완으로 끝난 동학농민군의 꿈을 상징하고요.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으로 끝나듯이 그들의 사랑도 당시의 현실에는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동학농민군과 갑이가 이루지 못한 꿈은 살아남은 이들의 몫으로 남아 이어지고, 그들이 이루어갈 것으로 믿습니다.


  학식 깊고 맘까지 너그러운 선비의 이마빼기처럼 훤하니 널찍한 배들평야에서 만난 갑이를 통해 나는 혁명을 배우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혁명과 사랑은 어딘가 닮은꼴이지 않습니까? 사랑을 글로 배울 수 없듯이 혁명도 글로 배울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저자 소개>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여자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9년 동양방송개국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모집에 ‘키 작은 코스모스’가 당선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해 그동안 20여 권의 소설과 시집, 수필집, 서간집 등을 출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마지막 사랑」, 「물망초」, 「이슬비」, 「기억의 상처」, 「하늘색 모자」등이 있다. 2004년 아들이 군에 입대한 후부터 월간<좋은 생각>홈페이지에 「이병 엄마의 편지」를 인기리에 연재한 데 이어, 최근에는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삶과 사랑을 그려낸 인터넷 퓨전 역사 연재소설 노은 ‘한뼘소설<갑이>’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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