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곡을 둘러싼 사람들 이야기, 전운소를 혁파하라
2026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특별전

기간 2026. 5. 11. ~ 2026. 9. 6.
장소 동학농민혁명기념관 1층 기획전시실(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전시기획 박아영(동학농민혁명기념관 학예사)
주최·주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후원 전북특별자치도
이번 전시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로(강, 바다)를 이용해 지역에서 서울 경창까지 세곡(稅穀)*을 운반한 ‘조운제도’와 조운업의 가장 말단에서 일하던 사람들, 이른바 ‘조군(조졸)’의 삶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전운소 혁파(革罷)*’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운소라는 단어를 현재 쓰지 않다 보니 동학농민군이 왜 그렇게 전운소 혁파를 외쳤는지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전운소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아울러 동학농민군과의 갈등 상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곡(稅穀): 쌀과 콩 등 백성들로부터 걷은 세금
*혁파(革罷): 묵은 기구, 제도 등 낡아서 못쓰게 된 것을 개혁하여 없앰
해로를 이용해 나라의 세곡을 운반한 ‘조운제도’와 가장 말단직, ‘조군’
조운이란, 고려시대부터 1895년 폐지되기 전까지 전국 주요 지역의 조창에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배를 이용해 경창에 납부하던 세곡 운반 제도입니다.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세금과 직결되는 일이므로 조선 정부에서도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세곡 대신 돈으로 납부하는 비율이 높아지며 운반하는 세곡의 양은 줄어갔지만, 동학농민혁명기에도 여전히 시행되는 제도였습니다. 세곡을 모아놓던 조창은 고려시대 전국에 13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양난 후 여러 차례 정비를 거쳐 조선 후기에는 9개의 조창이 확인됩니다.
이러한 조창의 관리자는 해당 지역의 현감 또는 그에 준하는 직급의 인물로 배정되었습니다. 조운에는 관리자를 비롯해 여러 직군의 참여자들이 함께했는데, 적게는 11척에서 많게는 29척에 달하는 조운선단의 통솔자와 선원 인솔자, 배와 세곡을 단속하는 관리자, 물길 안내원 등 다양한 직군의 많은 인원이 참여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힘든 업무에 시달렸던 이들은 조졸로도 불리는 조군이었습니다. 이들은 노를 젓거나 무거운 세곡을 운반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15세기 『경국대전』에는 전라도 3개 조창에 조운선 155척과 조군 5,960명이 배치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이들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조군 1명당 보인(保人) 2명씩을 지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국가의 세곡을 운반하는 등의 일에 매우 많은 인원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세금을 운반하는 중요한 업무’, ‘많은 인원의 투입’이라는 두드러지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조군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힘든 업무로 인해 도망자가 늘어나는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논하는 조선 정부의 자료를 통해 그들의 삶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 하나, ‘전운소를 혁파할 것[轉運所革罷事]’
한편,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시기별로 여러 종류가 전해집니다. 그 중 『전봉준형사재판원본』에 전봉준 장군이 직접 언급한 폐정개혁안*의 첫 번째 항목에 ‘전운소를 혁파할 것[轉運所革罷事]’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전운소’란 1883년에 설치된 기구로 세곡의 징수와 운반, 그리고 납부 등을 일원화하여 운영하기 위해 설치되었고, 책임자로 전운사를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신식 기선을 도입하여 운영의 편리함까지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동학농민군은 전운소를 혁파할 것을 외쳤을까요?
*폐정개혁안: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사회개혁안
이에 대하여 몇 가지 사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은 “전운사 조필영이 부임한 뒤 (세금의) 명목을 추가하고 세금에 세금을 가산하여 3년의 짧은 기간에 일약 소론 갑부가 되었다”라고 하였고, 전라감사의 군사마(軍司馬)*인 최영년은 “고부농민봉기는 전운사의 무분별한 징수에서 기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전운소의 폐단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이 남아있는데 이를 통해 전운소를 둘러싼 백성의 고통과 분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대한계년사』 등에 ‘조병갑 이전에 전운사 조필영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전운사의 악행이 조병갑과 비견할 만한 수준이었음도 가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군사마(軍司馬): 조선 후기 기마(騎馬) 관련 일을 맡았던 무관 벼슬
이러한 가운데 1894년 전라도 영광에서 동학농민군이 분노를 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세곡선 한양호 습격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급인 송문수를 필두로 수천 명에서 1만 명까지 추산되는 동학농민군이 군집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각종 폐단의 주범이었던 호남 전운사는 이미 도망간 뒤였으나, 이 사건은 일본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과 『고쿠민신문(國民新聞)』 등에도 보도되는 등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공사관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소요의 근본 원인은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것일 뿐만이 아니고 각 읍의 이서(吏胥)들도 전운하는 데 지쳤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전운을 폐지하려고 백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안팎에서 서로 호응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전운소에서 일하던 이들도 동학농민군과 함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만 동학농민군을 추적하는 일
동학농민혁명 참여 인원은 전국 3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데, ‘농민’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참여자의 모습을 ‘농민’으로 제한하여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시대의 직업군은 ‘사·농·공·상’으로 구분하였기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직업군인 ‘농민’을 명칭에 넣은 것일 뿐 참여자들이 전부 농민인 것은 아닙니다. 사농공상에 포함되지 않은 칠천반이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고, 지역의 현감이나 향교의 재장(齋長), 무관 관인 등 흔히 양반으로 구분하는 이들의 참여 기록도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조선 사회 저변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냈던 무명 농민군을 추적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조운제도’와 ‘조군’은 1894년까지 존속하였음에도 지금은 사라진 제도와 직군인 탓에 그 규모를 떠올리기조차 어렵지만, 분명히 조선 사회 전체에 존재했었습니다. 전시를 통해 30만 동학농민군의 다양한 모습을 떠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